통권 제1호) 이만치 떨어져 바라보는 그 사이들
이만치 떨어져 바라보는 그 사이들
‘운동권’이 뭐길래
“운동권 조심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한 친구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대학 생활에 대한 계획과 고민을 나누던 중이었던가, 구체적인 맥락은 흐릿하지만 아마 대학에 가면 운동권과 얽히지 않게 조심하라는 얘기였을 것이다. 6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조금 웃기기도 신기하기도 한 일인데, 그 친구는 무언가 느꼈던 것일까? 어쨌든 그 조언(?)을 들었던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친구의 말에 특별히 화가 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친구의 말에 동의한 것도 아닌, “아니, 운동권이라는 게 아직 있단 말이야?” 정도의 소감이랄까. 그때의 내 머릿속에서 ‘운동권’은 마치 현대사 책에서나 만나는 흑백사진 같은 단어여서, 친구의 ‘조언’도 현실감 없는 얘기일 뿐이었다.
그러다 에브리타임(에타) 에서 그 단어를 다시 만났다. 그 즈음에는 에타를 잠깐만 들여다봐도 ‘꿘충’을 욕하는 게시글이나 댓글을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었다. 온라인의 분위기는 비난 일색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그나마 ‘운동권’의 존재감이 남아 있었던 시기였기에 운동권을 욕하는 목소리도 그만큼 컸던 게 아닌가 싶다. 나는 그때에 116이르러서야 운동권이라는 게 빛바랜 단어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해되지 않는 말들, 이상하게 느껴지는 말들, 동의되지 않는 말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반복적으로 그런 말들을 접하면서, 운동권에 대해 막연한 거리감과 경계심을 가지게 된 것이 사실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약간의 변명을 해 보자면, 나는 대학 캠퍼스보다 온라인 커뮤니티인 에타가 더 가까웠던 ‘코로나 학번’(20학번)이었고, ‘꿘충’에 대한 욕은 내가 대학에서 운동권에 대해 접한 유일한 평가였다.
그렇게 수많은 욕을 얻어먹는 표적 중에 당연히 비서공도 있었다. 사실 욕먹는 정도로는 선두를 다투었다고 해도 심한 과장은 아닐 테다. 에타에서 하는 말만 보면 비서공은 거의 악의 수괴 중 하나라는 느낌이었고, 그 결과 비서공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좀 무서운 곳’이 되었다. 2학년이 될 때까지도 그 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학내 비정규직 노동자 취재 동아리라는 곳(빗소리)에는 또 들어갔는데, 나름대로는 빗소리는 학교 ‘공식 동아리’니까 ‘저런 데(비서공)’와는 다르지 않겠냐는,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생각이 있었다.
그 여름날 맞닥뜨린 것
나는 그렇게 2021년의 여름을 맞았다. 기숙사에서 한 분의 청소노동자께서 돌아가신 그 여름을 말이다. 학기가 끝나자마자 기숙사를 떠나 본가에 내려가 있던 터라 자세한 이야기는 알지 못하던 차에, 한 통의 문자가 왔다. 기숙사 번호로 온 그 문자는 “최근 이슈가 된 생활관 위생원 사망 사건 관련 부관장님 담화문을 입주자 분들께 전달드”린다고 말하고 있었고, 나는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으로 문자로 공유된 링크를 눌렀다. 어쩌면 문자를 본 순간에 이미 그 담화문이라는 것에 어떤 말들이 담겨 있을지 대략 짐작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열어본 담화문은 노조가 이 상황을 이용하고 있다고 운운함으로써 그 117불안감에 완벽히 부응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학교에 대한 기대와 믿음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던 게 그때였다. 서울대라는 곳이 참 이상한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해 국정감사 대응은 상당한 규모로 이루어졌다. 빗소리와 비서공에서 공동TF를 꾸렸고, 그 TF 활동에 참여하며 당시 비서공 학생대표였던 재현을 처음 만났다. 보통 편견이나 혐오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 편견의 대상을 실제로 만나봐야 한다고 얘기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나의 경우에는 그 해법이 적중했다. ‘비서공’이라는 추상적 대상은 멀고 의심스러웠지만, ‘비서공 학생대표 이재현’이라는 구체적 인물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며, 비서공에서 하는 일들이 빗소리에서 다루는 것들, 그리고 내가 생각해왔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비서공 후원회원을 제안받았고, 후원회원은 카카오톡 단톡방에 들어가서 소식을 받는 것 외에 별다른 부담이 없다는 생각에 승낙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비서공 집행위원(지금의 활동회원. 2025년 2월 총회에서 개칭)을 제안받았고, 이전보다 좀 더 길게 고민했지만 결국 집행위원이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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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10월 8일, 국정감사 대응차 국회를 방문한 은세(좌)와 재현(우). |
그러다 어느 날 대표가 되었다. 너무 많은 게 생략되지 않았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확고한 결심이나 계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기에 이렇게 표현하는 게 제일 적절하지 않나 싶다. 여러 상황상 어쩌다 보니 대표를 맡게 되었고, 집행위원이 된 지 반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여전히 많은 것들이 낯설었다. 비서공 활동 초반에는 다른 회원이 사용한 ‘동지’라는 호칭에 당황했을 정도로 학생사회와 운동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으니, 매번 새로운 것들을 배워가는 단계였다. 처음에는 회의 안건지를 작성하고 전체 톡방에 공지를 올리는 데에도 엄청 긴 시간이 걸렸을 정도였으니 말해 뭐할까. 재현과 공동대표였기에 망정이지.
22년 여름에는 인터뷰 요청이 많이 들어왔다. 21년 사망사건으로부터 1년이 지난 시점이라 그에 관한 취재가 여럿 있었는데, 문제는 그쯤부터 단독대표가 된 내가 사건 대응 당시인 21년 여름에는 비서공에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비서공 회원이 된 후 사망사건과 그 대응에 대해 이전보다 자세히 알게 되긴 했지만, 직접 대응에 참여한 사람과 시간이 지난 뒤에 그 내용을 배운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매번 여러 자료를 뒤지고, 모르겠다 싶은 부분들은 다른 분들께 물어보고, 인터뷰 후에도 혹시 잘못 말한 부분이 있을까 재차 확인했다. 그러고도 늘 불안감이 남던 때였다.
그해 여름을 말하면서 8월의 엄청난 폭우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폭우 2일차였던 8월 9일은 2019년 청소노동자 사망사건 3주기·2021년 청소노동자 사망사건 1주기 추모 기자회견이 예정된 날이었다. 엄청난 양의 비를 맞은 캠퍼스가 산사태에 휩쓸려 기자회견 장소도 엉망이 되었다. 청소노동자 선생님들도 밤중에 긴급히 출근해서 난장판이 된 학교 곳곳을 수습하시느라 정신이 없으셨던 터라, 결국 당일 아침에 기자회견을 취소했다. 후술할 청년학생 공대위를 119통해 다른 학교 학단위의 발언자들도 섭외되어 있었기에, 당일 취소는 그분들께도 너무 죄송한 일이었다. 내가 좀 더 능숙했다면 더 일찍 판단해서 취소하고 소식을 알렸을 텐데, 우왕좌왕하다 너무 늦게 결정을 내린 것이 후회로 남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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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8월 9일, 간밤의 호우와 산사태로 뻘밭이 되어 버린 아크로폴리스(좌)와 행정관 필로티(우). 노천강당 버스정류장 표지판이 뽑혀서 자하연까지 떠내려가는 엄청난 재해였다. (촬영: 이은세) |
나 역시 그 폭우를 몸으로 직접 경험했다. 기자회견 전날 실무 준비를 위해 머무르고 있던 학생회관을 떠난 직후 학생회관이 비 때문에 정전되었다는 소식을 다음 날에야 전해 들었다. 물이 차오르는 캠퍼스에서 어찌저찌 버스를 타고 집 앞에 내렸더니, 이번에는 거의 강이 되어버린 횡단보도가 장벽이었다. 흘러가는 물살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다 옆에 서 계시던 초면의 한 분과 손을 맞잡고 물을 헤쳐나갔던 기억이 여태 생생하다. 그렇게 겨우 집에 도착해 짐을 대충 던져두고 계속120해서 일기예보를 확인하던 중, 몇 시간 전 신사동(신림4동)에서 반지하 수몰 참사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리고 돌아가신 고인들이 백화점면세점판매노조 활동가와 그의 발달장애인 가족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기숙사를 나와서 대학동(신림9동)에 정착한 차에, 고인과 나 사이에 관악구라는 지역사회를 옆동네로서 공유한다는 연결과 노동의제에 관여하는 사람들이라는 연결이 이런 불행한 일로 교차함을 느끼고 마음이 참담했다.
비서공에서 내딛은 걸음들
학생대표의 중요한 직무 중 하나는 매 학기 총회를 주재하는 것이다. 총회에서는 지나간 학기에 사업을 어떻게 집행했는지 보고하고, 맞이할 학기에는 어떤 사업들을 진행할지 사업기획안을 채택한다. 그 가운데 일상적·상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소통사업·연례사업 이외에, 특별히 그 학기에 공력을 들여 준비하는 사업을 역점사업이라고 한다. 내가 단독대표를 처음 맡게 된 2022년의 역점사업으로는 상반기의 ‘어쩔생협: 어쩔 수 없을까? 생협을 알아보자!’ 전시회(4월 11일),[2] 하반기의 ‘스크린으로 낯설게 본 대학: 그 속에서 만난 노동’ 상영회(10월 6일),[3] ‘더는 노동자가 죽지 않는 대학: 우리의 공간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강연회(10월 13일)[4]가 있었다. 전시회는 생협 식당의 일괄적 식대 인상에 대한 대응 사업의 일환으로서 진행된 것이었는데, 생협의 구조와 그 문제를 학생들에게 알리고 생협에 대한 대학본부의 재정지원 확대 또는 생협 직영화를 촉구하고자 했다. 하반기 두 사업에서는 과분하게도 사업 성격상 꼭 필요한 사회자 역할을 맡았다. 서울대학교 학내 청소노동자 휴게공간에 대한 질적조사를 수행하여 석사논문 연구를 진행하신 김민지 당시 연구생께서 연구 내용을 바탕으로 의미있는 강연을 진행해주신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당시 질적조사는 김민지 연구생과 121재현이 함께 발품을 팔아가며 수행했는데, 나도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카드뉴스 형태의 소식지[5]를 만드는 것으로 미약하게나마 조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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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10월 13일 강연회. 무대 위에서 청중의 질의를 받는 사회자 은세(좌)와 연사 김민지(우). (촬영: 이재현) |
2022년 말에는 서울대병원·보라매병원 파업이 있었다. 두 곳의 파업출정식에 각각 연대방문을 다녀왔는데, 11월 10일의 서울대병원 파업출정식에서는 큰 무대 위에서 발언할 기회를 얻었다. 그렇게 높은 무대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발언한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긴장을 감출 수 없었다. 연대발언이 익숙지 않아서, 인사를 “투쟁!”으로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다른 이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그래도 그해 여름 고려대 청소·경비노동자 투쟁 현장에 연대했을 때 처음으로 발언이라는 것을 했던 때보다는 덜 무섭고 덜 떨렸다. 결국 직접 경험해 보며 배우지 않고서는 방법이 없는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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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11월 10일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서울대병원분회 파업출정식에서 무대에 올라 900명의 노조원들 앞에서 연대발언하는 은세. (촬영: 이재현)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서울대병원의 노동 현실은 서울대의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좋은 점을 닮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나쁜 점을 닮았습니다.”[6] |
당시에는 이렇게 될 줄 몰랐지만,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게 되는 SPC 대응의 시작도 2022년의 일이었다. 6월에 파리바게뜨 노동자들에게 연대하는 손자보 릴레이를 진행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10월에 SPC 그룹 제빵공장에서 우리 또래의 청년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돌아가시는 사고가 발생했다. 급하게 대자보를 쓰고,[7] 캠퍼스 내에 위치한 SPC 출연 건물(농생대 203동)에 그 대자보를 붙이고, 여러 인터뷰를 하고……. 그러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활동 사실을 들키기도 했다. 포털 사이트에 뜬 뉴스를 보신 부모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고, 교양 수업 과제로 사회 이슈를 조사하던 고등학교 친구에게서 카톡을 받았으며, 좀 나중의 일이지만 고3 때의 담임선생님께서 문자를 보내시기도 했다. 123와중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방송으로 나간 인터뷰를 채린의 부모님이 보시고는 “너랑 친한 언니 아니냐”고 물어보셨다는 것이다. 부모님께서 “(은세처럼) 쓸데없는 일 하지 말라”고 하셔서 알겠다고 답했다나. 참고로 채린은 이듬해 비서공 회원이, 또 그 다음해 비서공 대표가 되었고, 지금은 나보다 ‘쓸데없는 일’을 더 많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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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10월 28일 방영된 KBS 《시사직격》 〈제빵왕과 어느 청년 노동자의 죽음〉 편에 출연.[8] “SPC그룹이 노동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 기업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아왔는데, 그런 기업의 이름이 학내의 건물에 붙어 있다는 것에 학내 많은 구성원들이 같이 문제의식을 느껴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이 건물 근처에 대자보를 부착했습니다.” |
사람, 사람이 필요해: 만성화된 인력부족, 네트워킹으로 돌파 시도
맨땅에 헤딩하는 것만 같았던 대표로서의 첫 해는 그렇게 흘러갔다. 1년 동안 굉장히 다양한 경험을 했고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꼈다. 물론 그만큼 어려움과 고민도 많았다. 당시에 했던 고민과 걱정을 늘어놓자면 끝도 없겠지만, 나를 가장 괴롭혔던 건 “내가 대표를 맡는 게 비서공이라는 단위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대표를 했다면 단위가 더 발전하지 않았을까? 비서공이 더 활발하게 운영되지 않았을까? 거기에는 내 개인적인 역량의 문제도 있었고, 좀 더 구조적인 문제도 있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운동권’이 이미 ‘망’한 시대에, 심지어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운동권 이외의 학생사회 전반도 쑥대밭이 되고 나니 (나를 비롯한 코로나 학번은 새터도 경험하지 못했다) 늘 인력이 부족했다. 사람이 부족하니 크고작은 어려움이 많았다. 장기적으로는 비서공 단위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단기적으로는 소수의 인원이 많은 일을 나누어 수행하며 체력적 어려움을 겪었다. 어떤 시기에는 실질적으로 활동에 참여 가능한 사람이 나와 일휘 둘 뿐이어서, 지나치게 넓은 이 캠퍼스에 단둘이서 200장의 포스터를 붙이고 다녔던 적이 있다. 결국 14동 인문소극장 건물에 이르러 둘 모두 탈진해서 벤치에 한 명은 엎어지고 한 명은 드러누웠는데, 운동activism을 하려면 운동exercise을 하라는 말이 그저 농담이 아니라는 걸 그때 실감했다.
124다행인지 불행인지 (사실 불행이긴 함) 이런 인력 부족이 비서공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최소한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는 대학가에서의 운동·인권단위들 대부분이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구성원들이 많이 들어오지 않고, 그러니 적은 이들이 많은 일을 하게 되고, 그것이 힘드니 구성원이 줄고, 그러니 남은 이들의 부담이 커지고……. 당연히 이런 문제를 타개해보고자 하는 시도도 여럿 있었다. 그중 하나는 서울대 학내에서 진행된 권리의제네트워크 사업으로, 여건이 여의치 않은 학내 운동·인권단위들이 함께 모여 새로운 활로를 만들어보자는 야심찬 기획이었다. 아쉽게도 여러 어려움과 문제가 있어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꽤나 뜻깊은 경험이었다. 그 기획을 통해 비서공 회원 이외의 학내에서 활동하는 분들을 처음 만났고, 다른 단위들의 활동 경험을 접했고, 새로운 동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단위가 어려움을 겪는 것이 단지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나름의 위로가 되었다.
2023년 초에는 몇몇 단위들과 함께 ‘인권새터’라는 프로그램을 준비해 진행했기도 했다. 참여자가 엄청 많지는 않아 인권‘새터’라는 이름에는 충분히 부합하지 못했지만, 역시 다른 단위들과 교류하고 협력하는 경험을 쌓는 기회였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었다. 2023년 3월에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학소위)에 비서공이 가맹한 것도 (당시 초대 파견인 민재) 이러한 교류·협력의 흐름과 무관치 않았다고 생각한다. 사소한 부분이라 생각될 수도 있지만, 인권새터에서 진행한 프로그램이 이후 비서공의 주요 사업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캠퍼스를 도식화하여 보드게임 판으로 구성하고 각 칸마다 그 장소에 관련된 노동의제를 설명해둔 보드게임을 제작해 진행했는데, 이 아이디어가 이후의 ‘서울대 노동지도’로, 그리고 노동자 휴게공간 조사사업 목표로서의 지도 제작125으로 이어진 것이다. 해마다 새로이 만들면서 지도의 형태도 점점 추상적인 형태로부터 구체적인 형태로 발전해나갔다. 지도제작·매핑이 이렇게 비서공에서 내부 교육 및 정보 공유 차원에서 주요한 방법론이 된 것은 관악캠퍼스 특유의 무지막지한 면적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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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3월 17일, 인권새터에서 비서공 세션 진행하는 은세. 부루마불식의 보드게임을 만들었는데, 무려 행정관이 무인도라는 멋진 게임 설계였다. (촬영: 이일휘) |
학교 내에서만이 아니라 학교 밖에서도 네트워킹을 위한 움직임들이 있었다. 노학연대체들 간의 네트워크를 만들고자 했던 ‘대학 비정규직 간접고용 노동자 문제해결을 위한 청년학생 공동대책위원회(청년학생 공대위)’가 그것인데, 2022년 서울지역 대학들에서의 청소·경비노동자 투쟁을 겪으며 대학 단위들이 모이게 된 것이 계기였다. 각 단위들의 역량이 넉넉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청년학생 공대위의 본격적인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고 느슨한 연대체로 노선을 변경하게 되었지만, 126그래도 이 연대체를 경유해서 참여한 2023년 덕성여대 청소노동자 투쟁 연대성명 릴레이나 3·8 여성의 날 덕성여대 방문 등은 의미 있는 활동으로 남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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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3월 8일, 청소노동자 쟁의 중인 덕성여대를 방문한 은세(좌)와 채린(우). (촬영: 이일휘) |
윤석열 정부의 각종 (반)노동정책이 본격화된 2023년에는 그에 대응하는 비판 성명을 발표할 일이 많았다. 노동시간 연장,[9] 최저임금 차등화,[10] 노란봉투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11] 등과 관련해 대자보를 썼다. 노동시간 연장 대자보에 관해서는 연세대 방송동아리의 인터뷰 요청을 받아 채린과 함께 출연에 응하기도 했다.[12] 한편, 건설노조 탄압으로 분신하신 양회동 열사를 추모하는 성명의 대자보[13]가 훼손되는 사건도 있었다. 비서공의 해당 대자보 뿐 아니라 중앙도서관 게시판에 게시되었던 QIS, 학소위 등 여러 단위의 자보가 함께 훼손되어 공동대응에 나섰으나, 결국 범인이 밝혀지지는 않았다. 추후 예방 방안도 마땅치 않았는데, 만약 대자보 훼손 방지를 명목으로 게시판을 비추는 CCTV를 설치하게 된다면 그것이 오히려 대자보를 부착하는 학생들을 채증하는 127용도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대자보 훼손으로 의심되는 경우들이 있긴 했지만, 다행히도 이때만큼 대대적인 훼손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2023년 11월에는 비서공 조직 차원에서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긴급행동)’에 가맹하고 팔레스타인 연대사업을 시작했다. 2024년 3월 2일의 제10차 긴급행동 집회에서는 성명 낭독을 맡기도 했다. 그 전날 3월 1일의 제12차 총회에서 후임 대표를 인선하고 인수인계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 성명문 낭독이 비서공 대표로서 한 마지막 일이었다. 이후 민재의 뒤를 이어 학소위 파견인으로 가자마자 학소위 운영위원장이 되는 바람에 24년에는 비서공 활동에 많이 참여하지 못했다. 전임 학생대표로서 신경쓰고 챙겨야 할 부분들이 있는데 충분히 해내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함과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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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3월 2일, 팔레스타인 긴급행동 제10차 청계천 집회에서 공동성명문을 대표낭독하는 은세. “미 공군 소속 25살 애런 부쉬넬을 기억하자. 우리는 그의 고귀한 뜻과 함께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투쟁할 것을 다짐한다.”[14] (촬영: 스튜디오R) |
좋은 일들만 있을 수는 없다: 대표로서 겪은 고충들
한 단위의 대표로서 겪었던 다양한 고충들이 있었다. 우선 떠오르는 어려움은 돌발적인 사안과 급한 연락에 대응해야 했던 것이다. 사안이라는 것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게 아니고 돌발적으로 생기기 마련인 만큼 그때그때 빠르고 적절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었는데, 내가 잘 하는 영역의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소하게는 각종 연락들에 답하는 것 역시 자잘한 스트레스였다. 가령 기숙사 행정실에서 2021년 청소노동자 사망사건 유족에 대한 손해배상 판결과 관련된 대자보[15]를 언제 철거할 수 있겠냐고 물어본다거나, 2022년 SPC 관련 대자보[7]를 학내 파리바게뜨 옆에 붙였을 때 철거를 요청받거나 했던 것들이 기억난다. 문자를 주고받거나 통화하는 짧은 시간 내에 어떻게 답변해야 적절한 방향일지 고민하는 데에 상당한 심력이 들었다.
다양한 외부연대요청들과 캠퍼스 내 활동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 역시 상당한 고충이었다. 학내에서 어떤 사업을 구상하고 준비해서 집행하는 것은 다른 누가 아닌 우리가 직접 주도적으로 해야하는 일인 반면에, 학외 연대는 성격상 그만큼의 역량을 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바쁘다는 이유로, 역량이 없다는 이유로, 둘 중에서 학외 연대에 좀 더 무게추가 간 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있다.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무언가 말하는 것이 점점 두려워졌다는 것이다. 신중하지 못하게 말했다가 혹시라도 문제가 될까, 그리고 그것이 단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단체에 누를 끼치는 일이 되어버릴까 늘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인터뷰나 토론회 같은 곳에서의 공적인 발언은 물론이고, 일상적으로 무언가 말할 때에도 계속 걱정을 품고 있는 상태였으니 정도가 꽤 심했다고 할 것이다. 이 문제는 학소위장 활동을 하며 더 심해졌는데, 아무래도 보다 자유로운 지위에 있는 비서공과 달리, 학소위는 총학 산하기구로서 얻는 129것들이 있는 만큼 신경써야 할 부분도 많았기 때문이다. 총운영위원회(총운위)나 전체학생대표자회의(전학대회)에서의 정기 활동보고가 대표적인 일이었는데, 사실 활동보고라고 해 봤자 한두 문단 정도의 짧은 글에 불과했음에도 매 표현, 매 단어를 고민하느라 매번 꽤 긴 시간을 들였다. 작년 말 윤석열 퇴진 집회에 참여하고 나서, 윤석열 퇴진과 사회대개혁이라는 의제가 왜 ‘서울대학교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와 관련되어 있는지 최대한 상세히 설명하려 애썼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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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12월 5일 오후 4시 30분경, 오후 5시로 예정된 전체학생총회 전에 써붙이기 위해 급하게 공동성명[16]을 작성하는 학소위장 은세. “우와, 진짜 민주화운동 하는 것 같다 (찰칵)” “지금 그런 말 할 때예요?!” (촬영·혼남: 이일휘) |
졸업과 함께 한 발짝 물러서고 나서야, 그 정도까지 걱정하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었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려 했으나 최근 그 생각이 다시 쑥 들어갔다. 서울대에서는 아니지만, 여러 대학에서 학소위 130등의 자치기구에 대한 공격과 해체 시도가 연달아 일어났던 것이다. 당연히 자치기구들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지만, 공격하는 쪽에서는 ‘총학생회 자치기구가 왜 이런 활동을 하느냐’는 식의 레토릭을 자주 사용했다. 왜 총학생회의 예산을 가지고서, 총학생회의 이름을 걸고서 ‘이런’ 활동들을 하냐는 것이었다. 사실 자치기구를 공격하기로, 없애기로 이미 마음먹은 상태라면 아무리 설명을 상세히 하고 말을 조심하더라도 별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그것밖에라도 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던 거라고 지금은 생각하려 한다. 신입생 때부터 에타에서 비서공과 ‘꿘충’들이 욕먹던 광경을 봐왔던 사람으로서, 과하고 무용하다 하더라도 그런 걱정과 강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스스로를 이해하기로 했다. 그래서 2024년 5월의 한 학내 행사에서 김보미 58대 총학생회장을 만나 2016년 학생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굉장히 신기했다.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이 대통령 탄핵 집회에 나가서, 심지어 메인무대에 올라가서 발언을 할 수 있었던 게 10년도 되지 않은 일이라니, 그때와 지금 사이에 강산이 변한 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어 놀랐다. 소위 ‘정치적’인 활동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가 다수인 시절이 있었다니!
얻은 것과 얻지 못한 것들
아무튼, 다가온 학부 졸업도 졸업이었지만, 점차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나의 생각과 얘기를 잘 꺼내지 못하게 된 스스로의 모습을 보며 쉬어갈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23년이 힘들었다. 왜 그랬을까 돌아보자면, 22년 한 해 동안 활동을 하면서 체력적으로 지치기도 했고, 무엇보다 일들이 잘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지침이 있었던 것 같다. 다시 표현하자면,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그 부담 때문에 지치는 게 아니라, ‘무언가 자꾸 안 되는 상황’에 대한 지침이 심했다. 가령 하나의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2022년 말, 국정감사 및 총장131선거 대응을 위해 TF를 꾸렸고 그 중 노동의제 팀에 참여했는데, 팀 활동이 잘 굴러가지 않았다. 어찌저찌 노조 선생님들과의 면담을 진행하고 질의서를 작성하고 했지만, 처음 TF를 시작할 때 기대했던 협업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나 혼자 일을 했다는 그런 억울함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적으로 협업이 잘 되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관심을 가지고 참여한 팀원들이 별 효능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이 스트레스를 안겼다. 서울대 내에서 시도되었던 네트워킹도 성공하지 못했고, 대학 비정규직 청년학생 공대위도 기존 계획이 어렵다는 판단 하에 느슨한 연대체로 축소운영하게 되었다. 비서공 내부적으로도 회원들에게 충분한 소속감과 효능감을 제공하고 있는지, 그러지 못해서 회원들의 참여도가 낮은 것은 아닌지, 그래서 비서공 활동이 “잘 안 되”고 있는 게 아닌지 고민이 많았다. 그러면서 조금씩 소진되고 닳아갔다.
이런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얘기할 수 있다면 아주 훌륭한 결말이 되겠으나, 아쉽게도 나는 이런 문제들을 잘 이겨내지 못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대표로서의 임기를 마치기 전까지, 학부 졸업을 하기 전까지 온갖 불안과 걱정과 후회를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싱거운 대답이지만 임기 종료가 해답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서 불안이나 걱정을 관리하는 법을 익히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상태가 변화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그런 힘듦에도 불구하고, 나 개인으로서는 무언가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언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게 너무나 큰 의미가 있었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 해볼 수 있다는 점이,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깨달음이자 변화였던 것이다. 과거에는 문제를 인식하는 데에 머물렀다면, 비서공을 만나면서 문제에 부딪히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 구체적이고 다층적으로 되었음은 물론이다.
132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지점들은 있다. 올해 탄핵 시국을 겪으며 새로운 구성원들이 많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너무 좋은 소식이지만 한편으로는 왜 내가 대표직을 맡았을 때에는 그러지 못했을까 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내 부족함이나 잘못 때문이었던 건 아닐지, 아니면 그래도 내가 나쁘지 않게 했기 때문에 그 정도로라도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일지, 답이 있을 수 없는 질문을 되새김질하는 것이다. 단위가 활발하게 움직이는 시기라고 해야 할까,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는 때라고 해야 할까, 그런 때를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이 많이 아쉽다. 캠퍼스가 투쟁들의 연속이었던 2019년 같은 시기 말이다. 당연히 그런 때만이 의미있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지만, 2025년 1학기 들어 윤석열 탄핵 광장을 통해 많은 분들이 새로 가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의 역할은 2019년과 2025년 그 사이를 잇는 것 뿐이었을까, 하는 약간의 허탈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를 잇는다는 건
그래서, 글의 시작으로 돌아가서, 친구에게 “운동권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던 때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 친구가 조심하라고 했던 바로 그 ‘운동권’이 된 걸까? 글쎄, 여전히 나는 스스로를 ‘운동권’이라 말하기를 주저한다. 물론 그것은 더 이상 운동권에 대한 사회 일반의 부정적 시선 때문은 아니고――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나 정도가 ‘감히’ 운동권이라고 해도 되는 것인가라는 의문으로 인한 것이다.[17]
학교 안팎에서 존경스러운, 닮고 싶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들에 비하면 스스로는 너무나 ‘애매한’ 사람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133나는 잘 싸우지 못하고, 겁이 많고, 틀을 깨는 것을 불편하게 느끼고, 반항적이라기보다는 규범적이고, 주위 시선을 많이 신경쓰는 사람이다. 이런 점들을 회피하거나 부정하려고도 해 봤지만,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결국에는 바꿀 수 없는 나의 특성들이라는 게 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대학에서 활동하는 내내, 내가 하고 있는 활동과 내 기질 사이에 어떤 충돌이나 간극이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동짓날 밤 남태령에서도 그랬다. 그날 다른 분들(재현, 일휘, 채린)과 함께 남태령에 있으면서 학소위 깃발을 올릴지 정말로 한참을 고민했다. 깃발을 올려도 되냐고, 올리고 싶다고 말하는 채린에게 잠깐만 시간을 달라고 말하는 그 순간에 스스로가 참 싫어졌다. 일휘는 경찰이 가로막아서 못 가져오고 남태령역 2번 출구에 숨겨놓은 비서공 깃발을 틈이 생기자마자 챙겨와서 기다렸다는 듯이 올렸다. 깃발이 필요한 바로 그때에 깃발 올리기를 주저하는 내가 견디기 힘들었다. 이게 단위를 위한 고민인지, 아니면 그저 나의 비겁함일 뿐인지 수십번을 곱씹었다. 어쩌면 동짓밤의 겨울바람보다도 그 고민이 나를 더 지치게 했다. 결국은 깃발을 올렸는데, 우스운 건 그 후로도 그 깃발이 혹시라도 문제될까 한참을 걱정했단 사실이다. 다행히 별 일은 없었다.
이런 사람이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여러 일들이 겹치고 겹쳐 그렇게 되었겠지만, 돌아간대도 다른 길을 고르지는 않을 것 같다. 비서공이라는 공동체에 내가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그래서 더 잘해내지 못한 것에 대해 늘 많은 분들께, 특히 노동자 선생님들께 죄송하지만――그럼에도 나라는 사람에게 비서공이 너무 많은 것들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그걸 몰랐던 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활동을 통해 나는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내가 무력하게만 있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무언가 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내가 잘 싸우지 못하고, 겁이 많고, 틀을 깨는 것을 불편하게 134느끼고, 꽤나 규범적이고, 주위의 시선을 많이 신경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앎과 경험이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그때 비서공에 참여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거절했다면 언제 깨달았을지 알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남태령의 동짓밤으로부터 며칠 뒤에 전해 들은 이야기가 있다. 친구의 친구가 그날 밤 남태령에 있으면서 너무 춥고 무서웠는데, 서울대 학소위 깃발이 보여서 좋았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깃발 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비서공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가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볼 수 있었겠냐는 말이다. 그래서, 운동권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지금 이렇게 있다. 여전히 나의 어떤 면들이 탐탁지 않고 다른 활동가들을 보며 나의 부족함을 발견하게 되지만, 이런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런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일도 있다고 생각하려 한다. 조금 뻔뻔하지만, 비서공이라는 공동체를 유지하고 이어나가는 데에 내가 벽돌 하나 정도는 올리지 않았냐는 변명도 해 본다.
어느 토론회에서 “사람들이 즐겁게 활동할 수 있게 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18] 늘 스스로 분명한 목표나 야심이 없다고만 여겼는데, 돌아보니 이미 꽤 큰 목표를 가지고 있었구나 싶다. 에타에서 비서공에 대한 각종 비난을 보며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내가 어느 순간 바로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스스로를 여기게 되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를 길러나갈 수 있었던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도 비서공에서의 활동 경험과 비서공이라는 공간이 그런 의미가 될 수 있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사이를 이었다’는 것이 새롭게 보인다. ‘그 사이’는 앞과 뒤를 단순히 잇기만 하도록 그어진 무미건조한 직선이 아니라, 수많은 순간과 사람들이 서로 손잡아 채워낸 드넓은 공간이다. 순간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순간을 만드는 그 다채로운 135역동의 연속이다.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나도 다 쓰고 나서야 발견한 것이지만――지금 이 글에도 정말 다양한 종류의 ‘사이’들이 등장했다. 그리하여 비서공을 거쳐간 많은 이들에게 이곳에서의 순간들이 어떤 의미와 계기로 자리하게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는 있지 않을까. 비서공 집행위원으로서 4년, 대표로서 2년을 보낸 후의 내가 그 이전과는 결코 같아질 수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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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2월 26일, 은세는 4년간의 활동가 신분을 내려놓고 당분간 공부하며 쉬기로 했다. 조직 차원에서의 질곡들을 잘 해결하고 대표로서 겪었던 고충들을 잘 극복하고 대표직을 내려놓았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개인으로서는 뭘 할 수 있게 되었다. 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
“그래서 지금은 뭘 하고 있냐고 물어보신다면, 떠난 것처럼 글을 마친 것이 민망하게도 아직 학교에 있답니다. 이제 집행위원은 아니지만 연대회원으로 비서공과 계속 함께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