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권 제1호) 다시 만난 세종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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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세종호텔

조성윤
비서공 활동회원

2010년, 한국은 남아공 월드컵에서 원정 최초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우연히 TV에서 남아공 월드컵 조별 1차전 그리스전을 보게 되었고 2-0의 완승을 거둔 그 경기 이후로 축구에 빠져지냈다. 월드컵이 끝난 후에는 축구 소식을 접하기 위해 종이신문을 읽었는데, 처음에는 스포츠면만 펼쳐보았다가 점점 그 앞의 사회면과 정치면도 읽으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누군가 내게 “언제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었냐”고 물을 때 하는 답변이다.

초등학생, 중학생이던 내가 정치면과 사회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 정보들은 “어떤 정치인이 어떤 선거에 나오고 누가 여론조사에서 앞서 있다”는 수준의 것들이었다. 내가 중학생이던 2016년, 한국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로 광장이 아주 크게 열렸다. 서울에 살고 있던 덕분에, 나도 부모님 또는 친구들과 함께 박근혜 탄핵 집회에 여러 번 참석할 수 있었다. 지금에야 당시 박근혜 탄핵 집회가 여러 한계(여성혐오적인 구호들, 종차별적인 구호들 등등)가 있다고 평가하지만, 당시에는 박근혜라는 무도한 자를 끌어내리면 태평세상이 올 것이라고 기대하며 촛불을 들었다. (중학생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중학생이던 당시의 나로서는 그렇게 단순하게 세상을 이해했다. 그리고 결국 광장은 박근혜를 038끌어내렸다. 나는 ‘행동하면 세상이 바뀌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대학생이 되면 소위 ‘운동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고등학교에서의 3년을 지나, 대학교에 입학했다. 코로나19로 대면 활동이 거의 불가능하던 2021년을 지나 2022년 여름, 첫 노동조합 집회를 가게 되었다. 바로 목요일마다 열리는 세종호텔 집회였다. 세종호텔은 서울 명동역에서 30초면 도착하는 초역세권의 4성급 호텔로, 코로나19가 닥치자 매출 감소를 이유로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했다. 영어시험 성적을 기준으로 셰프와 주방보조를 해고하는 등 명백한 부당해고였다. 심지어 세종호텔이 코로나 이전 수준의 매출을 회복한 뒤에도 노동자들의 복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종호텔 앞에서는 해고노동자의 복직을 요구하는 문화제가 진행되고 있었다. 세종호텔 집회 가기 전까지 나는 사회 이슈에 대해 관심이 많은 편이라고 좀 뻗댔던 것도 같은데, 세종호텔 집회에서 본 광경은 정말이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세종호텔 앞의 인도와 1~2차선 정도의 차로를 막아놓고 진행된 이 문화제는 연단이나 간이 무대도 없이 바닥에서 진행되었고, 앉은뱅이 의자가 펼쳐져 있었다. 규모는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참가자들이 많았다고 생각하지만) 박근혜 탄핵 집회와 비교도 안 될 수준이었다. 참가자들은 모두 비슷한 조끼를 입고 있었고 대부분은 서로를 아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발언을 열심히 들었고 누군가는 열심히 듣지 않았다. 집회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거나 진심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매주 이 자리에 나오기 때문에 열심히 듣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임을 위한 행진곡은 알고 있었기에 민중의례 때 따라 불렀으나 이외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무슨무슨 ‘가’들이 제창되었다. (지금까지도 어떤 노래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박근혜 탄핵 집회에서는 구호를 외치기만 하면 되었는데, 여기에서는 구호 이후에 “투쟁”을 꼭 붙여서 외쳐야 했다. “세종호텔은 / 해고노동자 / 복직을 / 이행하라 / 투쟁”039같은 식이었다. 이들은 매주 목요일마다 이 자리에 있는 것 같았고 나는 내가 살던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세종호텔 집회에 참석한 경험은 부끄러우면서 소름끼치는 경험이었다.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감정을 느낀 것이 부끄러웠다. 세종호텔 집회에 참석한 날 이전에도 목요일마다 집회는 열렸을 것이고, 세종호텔 노동자들은 투쟁을 이어왔을 것이다. 분명 존재하던 세상을 모르고 살았던 것도 부끄러웠고, 모르고 살아도 잘만 살아왔다는 점도 부끄러웠다. 같은 조끼를 입고 매주 목요일마다 세종호텔 앞에 모이는 사람들을 모른 체하고 살아가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소름끼쳤다.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세종호텔로의 복직일 텐데, 이들에게 이렇게나 중요한 이야기를 누군가는 전혀 몰라도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이 소름끼쳤다. 세종호텔이 찾아가기 어렵거나, 내 집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가 아니라는 점도 소름끼쳤다. (물리적으로)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장소인데도 이제야 왔다는 것이 부끄럽고 소름끼쳤다. 한편으로는 세상에 얼마나 많은 투쟁들이 있고, 많은 사정들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숙연해지기도 했다.

방영환 열사 추모문화제에서 발언하는 성윤. (촬영: 이재현)
“당연한 권리를 얻기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세상이 계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후에 나는, 택시노동자이자 노동조합원으로 살다가 사측의 탄압에 항거해 분신한 방영환 열사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방영환 열사 정신 계승 투쟁문화제, 상시적인 고용불안과 중간착취에 시달리는 건설노동자들의 투쟁인 건설노조 투쟁문화제, 건장한 20대 남성 故 장덕준 노동자가 쿠팡에서 6일 동안 62.2시간을 일하고 급성심근경색으로 사망했는데도 사인이 ‘극도의 다이어트’라고 잡아떼는 쿠팡을 규탄하는 쿠팡 본사 앞 추모집회, 약속을 미이행하는 것도 모자라 저항하는 노동자들에게 불법과 폭력을 자행한 한화오션을 규탄하는 거통고조선하청지회 집회, 경영 실패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온전히 전가하려는 MBK에 맞서는 홈플러스 투쟁 문화제 등을 다녔다. 또 몸으로 040함께하진 못했지만 그동안 셀 수도 없이 많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다. 쿠팡에서의 계속된 사망에 대해, SPC에서의 계속된 사망에 대해, 화성 리튬전지 공장에서 일어난 참사에 대해, 학내 생협 인력 부족으로 인한 극심한 노동강도에 대해 투쟁이 이어졌다.

내가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아가는 일련의 시간들은 단순히 ‘지식이 늘었다’는 것만을 느낀 시간은 아니었다. 오히려 ‘감각’을 갖게 되는 시간이었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도 나는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 도서관에 있어도, 도서관의 분위기와 전혀 다른 장소에서 시험공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자신들의 투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감각하게 되었다. 또, 이러한 투쟁들이 정말 많고 투쟁들 저마다의 사정과 문제가 있다는 것도 감각하게 되었다. 감각은 얻었지만 041더 어려운 고민도 함께 생겨났다. (계속해서 노동자들과 내가 다르다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지만) 나와 언뜻 달라보이는 이 사람들과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생겨난 것이다. 학생인 내가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이유로 ‘우리는 모두 언젠가 노동자가 된다’는 어구를 내세울 수도 있지만 그 이상의 어떠한 설명이 더 필요하다는 막연한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연대’해야 하고, 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계속 고민하게 되었다.

중학생 때 박근혜 탄핵 광장을 겪었던 나는 여러 시간을 보내고 대학에 와 더 넓은 세상을 접하며 20대가 되었다. 20대 대학생이 된 나는 또다른 대통령의 탄핵 광장에 다시 나서야 했다. 8년 정도의 시간동안 세상도 나도 많이 달라졌고, 박근혜 탄핵 광장에서는 몰랐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윤석열 탄핵 광장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윤석열 탄핵 광장이 박근혜 때와 다른 점 중, 평등한 집회를 만들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가장 눈에 띄는 것이었다. 당연히 여전히 한계가 존재하지만,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의식적인 노력은 정말 의미 있는 것이었다.

나 개인의 감각 속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점은 노동조합들의 깃발이었다. 박근혜 때는 깃발을 주의 깊게 살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윤석열 탄핵 광장에서는 (계엄 직후의 분노를 잠시 잠재우고 깃발들을 보니) “노동조합 깃발이 이렇게 많았었나?”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노동조합원으로 보이는 집회 참석자들도 매우 많아 보였다. 노동조합과 시민들이 함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고민이 이어졌다.

2025년 1월 18일, 사전대회 이후 윤석열 탄핵 비상행동 본대회로 이동하는 금속노조 깃발 대오. 비서공과 서울대학교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 관악여성주의학회 달 깃발도 보인다. (촬영: 이재현)

박근혜 탄핵 이후로 우리 사회가 배운 귀중한 교훈은, 박근혜와 최순실, 그리고 그 일당들을 끌어내린다고 만사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배움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힘으로 윤석열도 끌어내렸고, 그 일당들에 대한 특검이 진행되는 중이지만 다양한 의제들에 대한 042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건설노조를 ‘건폭’이라고 매도하고 최저임금을 차등적용하려 했던, 주 120시간 노동을 말하고 실제로 69시간제를 도입하려고 했던 윤석열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노동현장에서 사람은 죽어가고 투쟁은 이어지고 있다. 노동 의제에 우리가 연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가능하고 왜 중요한가?

지금 세종호텔에는 민주노총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 고진수 지부장이 폭 1m도 안되는 좁은 통로에서 고공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고진수 지부장의 고공농성은 100일을 넘겼고, 8월이면 200일이 된다. 지난 5월, 친구들과 함께 세종호텔을 다시 방문했다. 나의 첫 노동조합 집회였던 세종호텔 앞에 3년만에 다시 섰다. 우리는 고공에 있는 고진수 지부장에게 인사도 드리고 연대의 뜻을 담아 리본도 달고 043메시지를 남기고 왔다. 중학생의 나에 비해 2022년의 나는 많이 달라졌고, 2022년의 나에 비해 2025년의 나도 달라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종호텔이 이렇게나 가까운 곳, 찾아가기 쉬운 곳에 있었다는 것을 다시 느끼며 또 한번 부끄러워졌다. 우리 집에서도 멀지 않고 내가 자주 다니는 시청광장이나 광화문 광장에서도 멀지 않았다.

누군가의 투쟁을 마주할 때마다, 누군가와 연대할 때마다 고민에 대한 해답보다, 고민만이 늘어나는 듯하다. 각 사업장마다의 투쟁 현황이 있다는 사실에 세상은 너무 부조리해 보이고 무력함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에나 그에 맞서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다시 힘을 내기도 한다. 고민이 많기에 아무 행동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고민이 많기에 더 많은 행동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그런 내가 되기를!

2025년 3월 29일, 고공농성장 아래 퇴계로를 지나가는 ‘가자! 평등으로 민중의 행진’ 대오에 손을 흔들어 주는 고진수 지부장. (촬영: 이재현)
같은 날, 행진 시작 전 세종호텔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비서공 깃발과 그 너머로 보이는 고공농성장. (촬영: 이일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