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권 제1호) 구미: 집, 그리고 한국옵티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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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

집, 그리고 한국옵티칼

임채린

비서공 활동회원

비서공 상임기수

(전) 비서공 제5대 학생대표
(2024년 3월 - 2025년 2월)

내 첫 기억은 구미에서 시작한다. 눈을 들어 올려다본 지평선에는 제법 높은 금오산이 있고 심심찮게 낙동강을 가로지를 수 있으며 대구, 칠곡, 김천과 근접한 도시. 7살까지 구미에서 살다가 다른 나라로 이사하게 되어 거기서 자랐다. 그래서 구미라는 지역에 크게 고향으로서의 애정은 없었고, 지금도 두 달에 한번쯤 들르는 ‘본가’일 뿐 애정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구미는 10월 말이면 온 도시에 독재자 박정희를 추모하는 현수막이 지겹도록 걸리는 박정희의 고향이기도 하며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포함한 여기에 사는 사람들 대다수는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구미에는 공단이 있다. 구미국가산업단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1~4단지가 운영되고 있으며 그 면적은 700만 평에 달한다. 박정희가 구미를 1973년에 지방공업개발장려지구로 설정하여 1단지를 조성했고, 지금은 5단지가 건설 중이지만 향후 건설할 단지들에 기업이 그만큼 입주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그 중에서 4단지에는 외국인투자지역이 있다. 업종, 소유주 국적 등의 조건에 맞는다면 입지 임대료를 최소 75% 감면해주기도 하며 조세도 감면한다. 인근에는 신축 아파트들이 죽 늘어서 있다. 경북 구미시 4공단로7길 53-29. 일본기업 니토덴코007의 자회사였던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공장이 여기에 있다. 박정혜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수석부지부장이 그 불탄 공장 옥상에 올라 있다. 나의 본가가 구미라는 부채감, 혹은 책임감으로 현장에 연대하며 겪고 느꼈던 일들을 조금 나누고 싶어 글을 쓴다.

지난 2월 8일 토요일 새벽 2시, 나는 부모님이 해외여행 일정으로 집을 비운 참에 대신 일을 맡아 달라고 부탁받아 구미에 내려와 있었다. 잠들기 전 트위터 타임라인을 스크롤하다가, 문득 서울에서 참여한 윤석열 탄핵 비상행동 집회에서 외쳤던 ‘박정혜 힘내라, 소현숙 힘내라’ 구호가 생각났다. 본가에 내려와 있기도 하니 최근 투쟁 상황을 찾아보고자 검색을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국회에 먹튀방지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한 희망뚜벅이가 그 전날인 2월 7일부터 옵티칼 구미 공장에서 시작했다는 것이다. 8일은 집 인근인 구미역에서 출발해서 어느 LPG충전소까지 걷는 코스였다. 헐. 갈까 싶어서 코스의 거리, 걸리는 시간, 코스의 끝에서 귀가하는 경로와 일기예보를 찾아보고, 집에 도시락으로 싸갈 만한 음식과 적당한 용기가 있는지까지 점검했다. 새벽 3시를 향해 가는 시간이었고 집합 시간은 오전 9시여서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겠구나, 싶었지만 아무렴 좋았다. 다음날 가져갈 도시락통을 꺼내두고 서둘러 잠을 청했다.

추웠다. 진짜 추웠다. 눈이 내렸던 전날과는 비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바람이 쌩쌩 부는 날이었다. 집회 현장에서 기동성 때문에 롱패딩을 입어본 적이 없었는데, 이 날은 롱패딩을 입고서도 너무 추웠다. 나눠받은 희망뚜벅이 몸자보를 입고 걸었는데, 주위 분들이 말을 걸어주셔서 적적하지 않게 걸을 수 있었다. 구미에 큰 공장을 가지고 있는 삼성은 무노조 경영을 오랫동안 유지해왔다가 최근에 노조가 설립되었는데, 그런 회사에서 평생 사측으로 살아온 아버지의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가 지금 그곳에서 일한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신 013분이 계셨다. 또 멀리서부터 구미까지 달려오셔서 연대동지들이 꾸린 희망뚜벅이 홍보팀에 함께하신 분도 만났다. 이분은 날 각계의 연대동지들이 모인 옵티칼 연대 소통방에 초대해주시기도 했다.

환대. 환대를 목격하고 체험했다. 중간에 쉴 때 도시락을 먹고 있었는데 어느 분이 대전에서 오셨는지 튀김소보로를 나누시기도 했고, 귤을 쥐여주신 분도 계셨다. 중간 간식 시간에 지회 차량에 잔뜩 싣고 오신 간식들도 받아 정말 감사히 먹었다. 배고플 일은 전혀 없었다. 이는 그 이후에 방문했던 옵티칼 연대 현장들에서도 동일하게 느꼈던 감상이었다. 옵티칼 공장에 연대하러 꼭 가보고 싶은데 갑자기 턱 나타나면 너무 난감해하시지 않을지 고민된다고 말했더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정말 따뜻하게 맞아주신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어느 분은 내 가방에 단 바이 플래그 뱃지를 보시고 (엄청 작은데!) 본인 가방에서 목에 두를 수 있는 크기의 프로그레시브 무지개 플래그를 꺼내 매셨다. 그분이 어떤 생각으로 그때 꺼내신 건지 감히 단언할 수는 없지만 보수적인 경북에서 퀴어함을 마주친 것이 반가웠다.

노학연대 동아리에서 활동해온 시간이 3년차가 다 되었는데, 부끄럽게도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존재를, 그리고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이야기를 희망뚜벅이에서 처음 알았다. 희망뚜벅이 때 처음 뵌 ‘김지도’가 어떤 분이신지, 마무리 발언 때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당일에 같이 완주한 모든 희망뚜벅이 참여자들에게 소감을 나눌 수 있도록 메가폰을 쥐여주셨고 김지도님은 나의 다음 다음 차례였다. 말씀하시기를 민주화운동 시절부터 열렸던 수많은 광장들에서 당신이 주인공이라고 느꼈던 적이 없었는데, 이번 윤석열 탄핵 광장에서는 2030 여성들이 전면에 나서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씀하셨다.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담아 발언하시는 목소리가 정말 멋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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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고서는 옵티칼지회에서 구미역까지 태워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소감을 나누면서 3월 1일에 국회까지 행진이 예정되어 있는데, 그때는 서울에서 꼭 뵙겠다고 말씀드렸다. 다음날에도 뚜벅이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함께하지 못하는 부채감이 컸다. 불탄 공장 위에서 농성하고 있는 박정혜, 소현숙 동지의 이야기를 아무도 하지 않는 이 공동체에서 고립된 것만 같았는데, 투쟁하고 있는 옵티칼지회 사람들은 어떤 기분일지 상상도 못 하겠어서 여력이 된다면 얼마든지 연대하러 가고 싶었다. 사실 내가 느낀 구미의 지역공동체라고 해봤자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두 분이 다니는 교회 정도였지만 그 교회에서 한국옵티칼 공장은 고작 차로 13분 거리였다. 그 정도 거리라면 그저 저기에 불탄 공장이 있었다는 발화에서 그칠 것이 아니지 않았을까. 민망했고, 죄송했고, 희망뚜벅이 일정에 더 많이 함께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2025년 2월 28일 희망뚜벅이 때 안양역 앞에서 보건의료노조 박문진 지도위원과 대화하며 깃대를 올리는 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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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에 갑자기 일정이 생겨서 2월 28일에 대신 참여하기로 했다. 안양에 놀러 간다는 핑계로 연구실에 연차를 냈다. 안양역에서 영등포역까지 걷는 일정이었고, 마찬가지로 9시 집합이었다. 낙성대역에서 2호선을 타고 신도림까지 가서 1호선을 갈아타 안양역으로 갔다. 2월 초에 비해 날이 조금 풀렸고 구미에서 걸을 때 다음에는 꼭 깃대를 들고 오겠다 약속했던 터라 비서공 깃대를 들고 갔다. 퇴진 집회가 한창이었던 시기라 비서공 깃대에는 비서공 깃발, 추모기, 팔레스타인 깃발,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 미니 깃발까지 깃발이 네 개나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안양역 광장에서 낑낑대며 혼자 깃대를 세우고 있으려니 김지도님과 의료노조 박문진 지도위원님이 오셔서 깃대를 잡아주시고, 지금 매다는 깃발은 어떤 뜻이냐고 물어보셨다. 차례대로 설명드렸더니 박 지도위원님이 당신 모자에 달린 팔레스타인 연대 뱃지도 보여주셨다. 김지도님은 2019년과 2021년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사건을 기억하는 추모기의 설명을 들으시곤 출발 전에 꼭 희망뚜벅이 참여자분들에게 깃발 뜻을 설명해달라 당부하셨다.

깃발 소개와 첫 뚜벅이 참여자 자기 소개와 평등수칙 낭독 후에 안양역에서 출발했다. 그때 “깃대는 앞으로!”가 들려와서 좀 쫄았다. 지난 뚜벅이 때 앞에 가시는 분들이 축지법 쓰듯 걸으셔서 따라가기조차 힘들었는데 선두라니 겁부터 먹고 봤다. 그래도 빠른 걸음으로 걸으니 나름 갈만했다. 안양을 거쳐 금천구에 진입하고, 그리고 영등포역으로 걸었다. 걷는 동안 구미 뚜벅이에서 만난 분과 재회했는데, 뱃지가 여러 개 달려 있는 내 가방에 관심을 가지셨다. 그런데 그분이 나에게 전날 희망뚜벅이 이후에 있었던 상영회에서 받은 금속노조 무지개 뱃지를 주셨다. 날 기억하시고 뱃지를 가지고 계시다 주신 것이 정말 감사했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가지고 싶었던 뱃지였기에 더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깃대를 들고 있어서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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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17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내 삶을 바꾸는 민주주의 1박 2일 대행진’ 때 국민의힘 중앙당사 앞에서 철야농성에 참여한 채린. (촬영: 대학신문 최영인 기자)

금천구청에 도착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내 삶을 바꾸는 민주주의 1박 2일 대행진’에서도 뵈었던 ‘다른세상을꿈꾸는밥차 밥통’에서 제공해주신 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가방에 방석을 미처 못 챙겨 나와서 금천구청 앞 대리석 바닥에 덩그러니 앉아서 식사를 하려는데 식사를 마쳐가시던 옆 분이 갑자기 나를 동지라고 부르시면서 방석을 쓰라고 건네주셨다. 여분의 방석도 아닌 것 같아서 사양하려는데 극구 권하시기에 받아서 앉았다. 차가운 바닥에 방석 하나 깔았다고 더 이상 춥지 않았다. 동지. 희망뚜벅이에서는 모두가 동지였다. 쌀쌀한 겨울 아침에 안양역에서 서울까지 고용승계와 먹튀방지법 제정을 위해 걸어가는 우리는 서로가 같은 뜻을 가진 동지이므로 오늘 처음 만나 통성명도 017채 하지 않은 사이여도 선뜻 선의를 베풀 수 있었다. 동지는 어쩌면 가족보다도 가까울 수 있는 사이다.

식사를 마치고 출발을 기다리며 어슬렁거리고 있었는데 김지도님이 나를 비롯한 여러 연대 동지들에게 금속노조 뱃지를 나눠주셨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지도님에 대한 인상이 뚜렷하지 않아서 뱃지에 대한 반가움이 더 컸다. 왜 그랬을까……. 어쨌든 저 뱃지 모으는거 너무 좋아한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인사드렸다. 김지도님은 담백하게 “그렇군요.”라고 말씀하고 지나가셨지만, 너무 소중한 선물이었다.

김진숙 지도위원과 말씀 나누고 김 지도에게 손수 받은 금속노조 뱃지. 기숙사로 돌아온 직후 문집 간사에게 빼앗겼다.[1] 간사는 심지어 희망뚜벅이 하고 온 사람을 포스터 붙이자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붙잡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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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구간에서는 별일 없이 열심히 걸어 영등포역까지 도착했다. 앞에서 길을 안내하시는 노조 방송차가 퇴진 광장에서 자주 불러졌던 노래들을 집회 버전으로 틀어주셔서 신나게 노래하며 걷기도 했거니와 이화여대 노학연대모임 바위의 동지들이 민중가요를 맛깔나게 불러주셔서 같이 온 동행은 없었지만 외롭지 않았다. 영등포역에서는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에서 갓 뽑은 가래떡을 나눠주셨다. 따끈따끈 정말 맛있었다……. 나름 가능할 때(대부분 운동activism하러 갈 때) 비건식으로 먹는 나로서도 배고플 일이 없었다. 정말. 환대란 이런 거구나…….

마무리로 박정혜 동지, 소현숙 동지, 김지도님, 박문진 지도위원의 마무리 발언이 있었고, 우리는 모여 단체 사진을 찍으면서 박정혜, 소현숙, 고진수, 김형수 힘내라!를 외쳤다. 희망뚜벅이는 그렇게 마무리가 됐다. 그리고 나는 희망뚜벅이 몸자보를 입은 채로 지하철을 타러 가서 조금 난감해졌다. 기념품으로 가지라고 해주셔서 황송해지기도 했다... 희망버스 때 입고 가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실제로 그러진 않았지만. 그날 오후에는 친구들을 만났는데 한 친구가 한국대중음악상을 받은 앨범 ‘음악만세’의 음악만세라는 곡에 김지도님의 퇴직연설이 피처링되어 실려 있대서 들어봤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조금씩, 그러나 닳도록 돌려 들었다. 새벽에 꼭 해야만 하는 작업을 할 때, 퇴진 집회에 오고 갈 때, 마음이 괴로울 때. 그리고 희망버스 안에서도.

4월 26일, 희망버스를 타고 처음으로 한국옵티칼 공장에 방문했다. 중간고사와 과제와 대학원 면접이 껴있는 시기였지만, 희망버스 일정이 나왔을 때부터 가려고 생각을 정해뒀었다. 그날엔 정말 사람이 많았다. 서울에서만 버스 네 대가 출발했을 정도였으니까. 도착해서 버스에서 내리니 흐렸던 서울과는 달리 햇빛이 쨍했다. 공장에 내려서 노조사무실로 가니 챙겨간 다회용 용기에 시원한 묵밥을 담아주셨고, 사무실에 자리를 내주셔서 편안히 앉아서 식사할 수 있었다. 당일의 일정은 019금속노조 결의대회와 희망버스 문화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금속노조 결의대회에서는 여러 지역에서 온 금방이(금속노조 마스코트, 정말 귀엽다)들의 인사와 발언을 듣고, 금속노조 몸짓패의 ‘파도 앞에서’ 공연을 봤다. 여태 봐왔던 몸짓과는 차원이 달랐다. 가사 그대로 몸짓에 파도가 살아 움직였다. 역시 진짜는 다르다(?) 같은 생각을 했다.

2025년 4월 26일 옵티칼 희망버스 때 멋지게 찍힌 사진. 비건 감자튀김을 먹고 남은 꼬치를 물고 있다. (촬영: 이일휘)

희망버스 문화제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기보다 다만 평화롭고 즐거웠다. 고공농성 3사 동지들의 발언, 김지도 특유의 문어체 가득한 발언,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연대 동지들의 발언, 다같이 민중가요를 부르고 몸짓하는 시간도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비건감튀트럭의 감자튀김을 먹어볼 수 있었다. 정말 바삭바삭하고 맛있었다. 자꾸 먹는 데에 감명받은 이야기만 하는 것 같아서 웃기지만, 다녀온지 몇달이 지난 시점에서 기억에 남은 것이 무얼 먹었는지에 관한 것밖에 없다. 안타까운 020일이다. 문화제 중간에 (당시) 상임기수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비서공 깃대를 내게 넘기고 어딘가 다녀온 일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무대 발언을 마치고 내려와 나무그늘에서 쉬고 계신 김지도님께 찾아가 말을 걸고 왔다는 것이었다. 나도 구미에서, 안양에서 뵈었다고 인사라도 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내향인 이슈로 그러지 못했다.

박정혜 동지, 소현숙 동지가 이 평화롭고 즐거운 감정을 같이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사람들과 서로 어깨를 잡고 기차놀이를 하면서 ‘세상에 지지 말아요’를 부르며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문화제의 후반에는 기획 측에서 준비해주신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꽃 스티커를 공장 외벽에 붙여 꾸미는 순서가 있었는데, 점프해서 제일 높은 곳에 붙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더니 어떤 분이 깃대에 스티커를 붙여 옥상의 동지들에게 전달하려고 하고 있었다. 동지들은 손을 뻗어 021스티커를 잡으려 했다. 그걸 보고 나니 내 스티커는 아무래도 좋았다. 소현숙 동지가 먼저 스티커를 잡았고, 그 뒤에 다른 분이 또 전달해주셔서 박정혜 동지가 스티커를 받아서 붙였다. 울 것 같았다.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답답했다. 두 사람이 내려오지 못하는 이유인 니토덴코에게 화가 났고, 아무도 이 행사를 막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무력감을 조금 느꼈다. 옛날에 있었던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때는 사측과 경찰이 참여자들을 집단건조물불법침입죄 명목으로 해산시키고 체포하기 위해 최루액과 색소물대포를 동반했었다는데,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공장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탄 폐공장이라서 니토덴코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되었다. 서울에서 지겹도록 봤던 경찰버스도 한 대 보이지 않았다. 희망버스 끝나고 서울에 돌아오자 소현숙 조직부장이 치통 악화로 인해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정혜 부지부장이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그 이후 국회청원으로 성사된 옵티칼 청문회는 장관 인사청문회가 끝나야 열릴 수 있을 터이다. 지워지는 사람들, 밀려나는 사람들의 존재에 관해 화가 났다.

폐공장 옥상에서 스티커를 전달받는 박정혜 수석부지부장과 소현숙 조직부장, 그리고 비서공 깃발. (촬영: 이일휘)

한국옵티칼 공장 맞은편에 천(川)을 하나 건너면 대형 아파트 단지가 있다. 거기 사는 사람들은 여길 볼 수 있을까, 혹은 보지 않으려고 할까? 나는 가끔 이 사람들이 보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불탄 공장에 노동자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이들이 싸우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다. 나는 정작 구미에 산 기간이 얼마 되지도 않고 연고가 깊지 않음에도 이 사람들에게 자꾸만 실망하고 냉소한다. 어쩌면 외로워서일지도 모르겠다. 금오산 산등성이를 보고 박정희의 얼굴 윤곽이라고 하고, 탄핵 정국을 겪고도 국민의힘 후보를 뽑고, 기업과 자본가의 편에서 서서 생각하는 사람이 정말 많은 이곳에서 혼자라고 느끼는 것일지도.

객관적으로 구미는 여전히 끔찍한 도시다. 앞서 열거한 것 외에 이런 점도 있다. 제조업 도시라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지만, 그들에 022대한 시선은 좋지 않고, 그들을 사용하는 고용주들도 좋지 않다. 가족들이 다니는 교회에 유일하게 좋은 점이 외국인노동자 상담센터를 운영한다는 것이다. 공장에서 일하다 폭언・폭행을 당한 이주노동자가 있었는데, 안산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을 피해서 구미로 온 사람이었다. 지난 2월에는 손가락이 거의 절단될 뻔한 사고를 당한 사람이 있었는데, 300만원 공상처리[3]로 넘기려는 경우가 있었다. 교회를 통해 알게 된 사연들이지만, 결국 교회는 시혜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다. 외국인노동자 센터와 외국인부가 있지만, 그 사람들은 교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통역 문제라고 하지만, 예배할 때 섞여 앉지 못한다. 명시적으로 차별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인들이 그들의 옆자리를 피한다.

하지만 구미를 박정혜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수석부지부장이 불탄 공장 옥상에서 홀로 농성하고 있는 도시로 지칭할 때, 냉소와 실망은 그의 투지에 비하면 가소로운 것으로 된다. 그 투지는 자기연민이나 냉소로 덮을 수 없다. 그렇다, 구미는 여전히 끔찍한 곳이다. 하지만, 그곳에도 일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곳에도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리고 투쟁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함께 투쟁해야 하고, 냉소주의를 멀리해야 한다.

7월의 마지막 날에 고공농성 합동문화제가 구미 한국옵티칼 공장에서 진행됐고 나는 마침 구미에 있어서 그 자리에 다녀왔다. 계속 무너지고 있는 공장 옆에서 박정혜 동지와 마주보고 문화제를 지켜보았다. 희망버스 때보다 힘없어진 목소리에 마음이 아팠고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은 여전했지만, 그럼에도 박정혜 동지는 내려오지 않고 023있다. 이 무더운 날씨에 걱정이 따르지 않을 수 없지만 고공에 동지가 있는 한 우리는 그 투지를 본받아 땅에서의 싸움을 이어나가지 않을 수 없다. 함께 싸우고 함께 이기자고, 끝까지 싸워서 땅을 밟자는 구호를 외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부모 앞에서 잠시 빼두었던 ‘이겨서 땅을 딛고 싶어요’ 뱃지를 다시 달았다.

8월 9일, 박정혜 수석부지부장이 고공에 오른 지 580일이 된다. “500일을 넘기지 않게”를 외치며 희망버스를 타고 내려갔다 온지 두 달 넘게 지났다. 올해 2월에서 3월까지 진행한 옵티칼 희망뚜벅이가 끝난 지도 다섯 달이 넘었다. 600일이 되기 전에, 옵티칼에 다녀간 노동부 장관이 해답을 내놓길 바란다. 국회가 부름에 답해 니토덴코 청문회를 하루빨리 열길 바란다. 니토덴코가 교섭에 성실히 응하길 바란다. 그리고 박정혜, 고진수 동지가 이겨서 땅을 딛기를 정말 간절하게 바란다.

2025년 7월 31일 고공농성사업장 공동투쟁문화제 활동보고 사진. 채린은 집에 있다 나온 티가 역력하다. 배경의 공장 옥상 위에 박정혜 수석부지부장이 보인다. (촬영: 연세비정규공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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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追記):

문집 편집 기간 중인 2025년 8월 29일, 한국옵티칼지회 박정혜 수석부지부장이 고공농성을 해제하고 땅을 딛었습니다. 고공농성 600일차에 정부와 민주당이 문제해결에 나서겠다고 약속하자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지만 고공농성의 끝은 투쟁의 끝이 아닙니다. 니토덴코를 청문회에 세우고 평택 공장으로의 고용승계, 그리고 먹튀방지법 제정을 위해 꾸준히 기억하며 연대하고자 합니다.

끝까지 웃으면서 함께 투쟁!

2025년 8월 29일 학부 졸업을 하면서 문집 간사에게 졸업선물로 받은 『소금꽃나무』의 면지(面紙).
“언제 이런 걸 받아오신 거에요? …아, 희망버스 때!” (촬영: 임채린)
×  (편집부) 음해입니다. 자기는 무지개 금속노조 뱃지가 더 좋다며 먼저 주었습니다.
×  (편집부) 이것은 사실입니다.
×  (편집부) 산재보상금 대신 회사 돈으로 보상해주고 산재처리 안 하기로 합의하는 것. 이런 합의에는 사건을 사건화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암묵적 또는 명시적으로 포함된다. 사인 간의 합의가 법보다 우선할 수 없기에 공상을 해도 산재 이후 3년 안에는 산재신고가 가능하지만, 당사자가 법적으로 피곤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