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권 제1호) 인터뷰: 계엄령에 맞선 서울대학교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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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령에 맞선 서울대학교 노동자

남궁윤 기전노동자 인터뷰

지난 2024년 12월 3일 심야의 비상계엄 사태는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리고 우리 사회를 거대한 소용돌이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는 상식과 양심에 따라서, 누군가는 과거의 끔찍한 역사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국회 앞으로 달려 나와 계엄군과 대치하고 끝내 위법한 계엄령을 해제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런 기여자들 중 한 분이 우리와 가까운 데 계셨음을 우연히 알게 되어 말씀을 청해 들었습니다.

간단히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립니다.

제 이름은 남궁 윤이라고 합니다. 서울대학교 919동 학부생기숙사 방재실에서 근무하고 있고, 민주일반노동조합 서울대지회 조합원입니다. 작년까지는 BK국제관에서 근무했었고요. 서울대학교에서 하는 일은 건물을 유지보수하는 기계전기(기전) 직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생활하는 방에서 전등이 나가거나 스위치가 망가지거나 그런 문제가 생겼을 때 신고가 들어오면 대응하고, 유사시 사감조교를 통해서 공문을 받아 CCTV 열람을 하게 해 드리고, 저희 선에서 직접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전문업체에 연락하도록 하는 중간 역할까지, 그런 일들을 합니다.

2024년 12월 4일 오전 0시 45분, 남궁윤 노조원은 다른 시민들과 함께 국회대로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국회 정문을 향해 진입하는 군용차를 가로막았다. (촬영: 남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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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에서 일하게 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울산, 여천, 서산 같은 공단지대에 공장을 짓는 건설회사에서 자재관리 업무를 했습니다. 건설회사이다 보니 이란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해외근무도 했고요. 건설사에서 처음 했던 일은 자재관리에 사용되는 코볼 프로그램을 서버용 프로그램으로 전환하는 프로그래밍 일이었습니다.

공사에는 필요한 물건들이 수십만 가지가 되고, 설계도면을 보고 물건을 발주해야 하는데 설계라는 게 지속적으로 변경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발주된 물건이 가야 할 곳에 옳게 갔는지 확인하고 관리해야 하는데, 상당히 복잡하고 전문적인 일입니다. 또 그런 공장들은 폭발성이 있는 위험물을 다루기 때문에 철저한 품질관리를 요합니다. 그러니까 설계부터 구매, 운송, 모든 과정을 이해해야 하는 업무이고, 기전이나 소방 업무에서 사용되는 용어 같은 것들은 그때 이미 배우고 익혔습니다.

이런 경험과 배경이 서울대에서 시설유지관리 업무를 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됩니다. 특히 건물에 뭔가 문제가 생기면 도면부터 찾는데, 저는 기본적으로 도면을 볼 줄 아니까요. 그래서 퇴직 후에 산업기사 자격을 갖고 서울대에서 일하게 되었고, 틈틈이 기사 자격 준비도 하고 있습니다. 이과 출신이라 기본지식은 있지만, 나이 때문인지 쉽지는 않네요(웃음).

작년 12월 3일 계엄 당일 어떤 일을 겪으셨나요?

집에 TV가 없어서 뉴스로 그걸 보지는 못했어요. 휴대전화로 동영상을 보면서 기사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고등학교 친구들 카톡방에 갑자기 계엄이 떨어졌다는 말들이 올라왔습니다. 처음에는 황당한 소리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11시 30분인지 40분인지 그 무렵 065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어요. 저희 집이 영등포경찰서 부근이거든요. 그래서 카톡에 올라오는 그게 진짜인가보다 싶었고.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산책하는 척, 걸음수 채우는 만보기 앱 채운다는 핑계로 밖으로 나왔어요. 영등포에서 샛강 건너 국회의사당으로 통하는 파천교까지 가 봤는데 차량 통제가 안 되고 원활하게 차량들이 지나다니더라고요. 그래서 슬금슬금 가다 보니 국회의사당 문 앞 수소충전소까지 갔어요. 다가가 보니 차량들이 모여 있더라고요. 군용차가 아니라 일반 차량들이었어요. 시민들이 모였던 거죠.

2024년 12월 4일 오전 0시 50분, 시민들이 타고 온 승용차와 경찰 차량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된 국회대로. 먹구름 낀 하늘에 헬리콥터 세 대도 보인다. 배경 왼쪽의 구축아파트처럼 생긴 건물이 KBS 사옥 연구동이고, 이 시야에서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면 국회 앞 수소충전소가 보인다. (촬영: 남궁윤)

그때가 11시 40분쯤 집을 나서서 국회 앞에 도착한 게 자정쯤이었어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경찰차와 군용차도 있었어요. 066제가 도착한 이후에도 사람들이 조금씩 계속 국회의사당 쪽으로 모여들고 있었어요. 그러다 한 번 소동이 일어났는데, 일부 군인들이 수소충전소를 통해서 국회로 밀고 들어가려고 시도를 하니까 사람들이 그걸 막으려다 폭력적으로 변할 것 같은 상황이 되려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다니면서 “절대로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무슨 상황이 생기더라도 시빗거리를 만들면 안 된다.” 군인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리고 그날부터 이미 계엄을 찬성하는 사람들도 소수 거리에 나와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과도 충돌이 일어나려 해서 자제시키고. 그렇게 “자극하면 안 된다, 자극하면 안 된다.” 계속 외치면서 다녔어요. 그리고 중간중간에 경찰에 막혀서 국회에 들어가지 못하는 보좌관이나 의원들이 담을 넘어 들어가는 시도를 하고 있어서 그걸 밑에서 받쳐 주기도 하고. 그러고 나서 시간이 지나면서 계엄해제가 의결되었다는 소식이 카톡으로 올라왔어요.

2024년 12월 4일 오전 1시 43분, 남궁윤 노조원이 채증한 계엄군 철수 영상의 한 장면. 가로등 불빛에 총기의 플라스틱 광택이 살벌하게 번득인다. “다친 사람은 없지요?” 물었지만 계엄군은 묵묵부답이다. (촬영: 남궁윤)

해제된 이후에도 국회 주위를 시계방향으로 빙 돌았어요. 그때 군인들 한 무리가 장비인지 뭔지 박스를 들고 철수하더라고요. 그래서 혹시 증거자료가 될까 싶어서 동영상을 찍었지요. 그 군인들이 철수하는 걸 확인을 하고 귀가하려고 국회의사당 뒤쪽 한강둔치 선착장 쪽으로 가는데, 그때 시간이 새벽 2시 30분쯤이었어요. 그런데 담배라도 피고 가려고 어스름한 곳으로 들어갔더니 뭔가 섬뜩한 그림자들이 잔뜩 모여 있는 거예요. 또 다른 군인들이 한 무리 있더라고요. 그런데 거기는 앞서 촬영했던 군인들하고는 복장이 달랐어요. 시커먼 색으로 통일해 입은 것이 특수부대 같았지요. 가까이 가서 확인하기에는 겁이 나서 멀리서만 보다가 집으로 돌아가니 새벽 3시였어요.

여의도 선착장의 ‘섬뜩한 그림자’. 무엇인지 빛나는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촬영: 남궁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정말 아찔하더라고요.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 의심이 되어서 아무 생각 없이 나갔는데, 나중에 돌이켜 보니 만약 그날 거기서 어떤 불상사가, 충돌이, 유혈사태가 생겼다면 죽는 067자리에 있었구나,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그런 자리에 나갔구나. 그런데 이게 제대로 된 일이 아니니까 안 가 볼 수가 없고. 뭔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서 그 현장에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갔었어요. 나중에 혼자 그때 생각을 다시 하면 끔찍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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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해제 이후에도 탄핵 요구 집회에 나가셨나요?

그랬지요. 특히 12월 7일, 탄핵소추가 한 번 실패했을 때. 그날은 계엄 이후 처음 있는 대형 집회다 보니 주최 측이 제대로 있지도 않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너무 많이 움직이면서 위험했어요. 사람들이 계속 왔다 갔다 하는데 막 엉키는 거예요. 밀려서 넘어지면 사고 날 상황이 될 것 같고.

비상행동 결성(12월 11일) 이전, 따로 집회 주최측이 없어서 교통통제도 되지 않고 휴대전화 데이터도 터지지 않아 아비규환 혼돈의 도가니였던 2024년 12월 7일 탄핵 촉구 집회. (촬영: 이일휘)

비서공 학생들도 그날 나갔었는데 말씀대로 정말 위험했습니다. 게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서 휴대전화가 먹통이 되면서 상황 파악도 힘들었지요.

첫 직장이 국회의사당 앞이었거든요. 그 부근 지리를 잘 알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한 줄로 다니도록 교통 정리를 했어요. 한 시간 반 정도 069그러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와서 그걸 같이 돕고. 그 이전에 일단 나가서 머릿수를 채워야 한다, 뭔가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머릿수를 채워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지요. 그래서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때도 나갔었고.

아까 생각 없이 나가셨다고 하셨지만, 말씀 듣다 보니 생각이 없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요.

이게 이게……, 계엄이라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었거든요. 80년 광주항쟁이 있었을 때 제가 중학교 2학년인가 3학년인가 그랬어요. 하지만 그 당시 매스컴에서는 빨갱이 소행이라고 다들 천편일률 보도를 해서 대학을 들어갈 때까지도 그 상황을 잘 몰랐는데, 85년도부터 외국 기자들이 촬영한 광주항쟁 비디오테이프들이 대학가에 돌았어요. 그리고 같은 과 동기 중에 광주 출신인 친구가 있었고……. 4·3 사태도 그렇고, 조작된 간첩사건 같은 것들, 수많은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반복되어서는 안 될 끔찍한 역사니까.

그래도 그때까지는 아직 시위나 그런 건 운동권 학생들만 하는 그런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서, 아파트 청약을 들어서 분양받은 아파트가 건설사가 부도가 나서 중도금을 날리게 된 상황이 되었어요. 거의 전 재산을 넣었는데 건질 수 없게 되자 그걸 찾겠다고 구청 앞이나 주택공제조합 앞에 가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시위했어요. 그러면서 이 시위라는 것이 내 일이 되는구나. 남의 일이기만 한 게 아니라, 내 생활에 미치는 일 때문에 시위가 내 일이 될 수 있구나, 그런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또 직장에서 우연치 않게 노동조합 간부, 부서별로 있는 분회의 분회장을 하게 되었어요. 노조 활동을 하면서 임단협(임금교섭·단체협약) 할 때 조합 측 협상위원으로 들어가 보기도 하고. 임단협을 할 070때 노조 간부들이 다 모여서 1박 2일 동안 워크샵을 하면서 토론도 하고, 사측에서 이렇게 나왔을 때는 저렇게 대응하자는 대항논리도 준비하고, 그렇게 해서 임단협에서 노조 측 요구를 관철하는 데 성공해 보고. 그때는 아직 IMF 이전이었기 때문에 퇴직금 누진 이런 걸 요구할 수 있었어요. 그런 걸 경험하면서 노동조합의 역할이나 노동운동의 의미 같은 것을 알게 되었지요.

여기 서울대학교에서도 노조 활동에 열심히 임하셨지요? 작년에 저희가 호호체육관 사업을 주관할 때도 뵈었었고요. 다른 조합원들에 비해서도 노조 활동에 열심이신 것 같은데, 그런 경험들이 있으셨기 때문일까요?

머릿수를 채워야지요(웃음). 뭘 하든 머릿수를 채우는 게 중요합니다. 제가 여기서는 노조 간부는 아니지만, 지회장님께 뭔가 도움을 요청받으면 적극적으로, 최우선적으로 도와드리려고 노력하지요. 현안을 쉽게 파악하기 위한 자료정리를 해서 표로 만들어 준다거나, 필요한 문구를 정한다거나 그런 일들이요. 어떻게 하는지 경험이 있으니까요.

2024년 호호체육관 사업에 참여하신 남궁윤 노조원. 남궁 노조원께서는 테니스, 배드민턴, 탁구 등 각종 운동을 즐기며 또한 상당한 실력을 갖춘 스포츠맨이기도 하다. 호호체육관 사업에서는 동료 노동자들에게 탁구를 가르쳐 주는 코치 역을 자임하기도 했다. (촬영: 윤성희 사진기자)

참 안타까운 것이, 학교 밖에서는 사람들이 조합 활동이 자기 권리라는 것을 잘 몰라요. 조합이 자기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도 잘 모르고. 조합의 존재 이유를 그렇게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지가 않더라고요. 매스컴에서 노조를 이권집단이라고 매도하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매스컴은 광주항쟁 때도 그런 천편일률 보도를……. 그러다 보니 건설노조에서 안타까운 일도 있었지요.

그 밖에도 국가가 세금으로 국민을 책임지는 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보장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위정자를 나랏님이라고 감사해하는 분들이 특히 어르신들 중에는 많이 있어요.

또 요즘 저 태극기부대라는 사람들 보면 미국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다 해결해줄 것이라고 그러잖아요. 미국이 우리에게 도움을 준 것071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네의 국익을 위해서 그러는 것인데, 그 사람들은 그런 걸 생각을 못하고 미국에 종속된 나라가 되고 싶어하지요.

저도 편견이 아예 없는 사람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뭔가 시각의 각도를 돌려서 보면 달리 보이고 쉽게 보이는 면들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런 걸 외면하고 생각하지 않으려 할 때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이번 계엄 사태를 겪고서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실까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스타일이 윤석열 같은 스타일인데, 그 싫어하는 이유가 무책임하기 때문이에요. 문제가 생겼을 때는 밑의 사람 탓이고, 잘한 일이 있으면 내가 잘한 거고, 이런 책임자나 리더는 안 됐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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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리더가 된다는 게 비단 대통령만을 의미하는 건 아닐 것 같은데요.

그렇지요. 어떤 조직의 장이든, 취직해서 높은 자리에 가든. 제가 해외 건설현장에서 일할 때, 현지인들이 말단 노동자, 인도인이나 필리핀인들이 중간관리자, 한국인들이 최고관리자였거든요. 그런데 다른 부서 한국인 직원이 우리 부서 외국인 직원들에게 함부로 하고 욕하고 그래서 제가 막았던 적이 있어요. 할 얘기가 있으면 나하고 얘기하라고.

그들을 통해서만 제가 원하는 성과를 올릴 수 있고 평가를 받게 되잖아요. 그러면 그러기 위해서 어떤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줘야 하는가. 결국 사람 대 사람으로 사람답게 대해야 하지요. 그들에게 항상 당부했던 게 돈 벌러 와서 다쳐 나가는 게 최악이다, 다치지 말고 일하자고 했어요. 여러분이 리더가 되고 싶다면, 책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요.

일터로서 서울대학교는 어떠했나요?

문제가 없지야 않고 그런 걸 해결하려고 조합 활동도 했지요. 그래도 젊은이들 많이 보는 게 좋고, BK국제관은 어린이들 떠드는 소리가 들려서 즐거웠어요. 제가 해외 근무를 해 봤다 보니 외국인 입주자들과 의사소통도 되고. 또 인도나 이란 같은 데는 손님에게 무조건 차 대접하는 게 기본적인 문화이거든요. 그래서 업무차 찾아갔다가 대접받고 교류하는 일도 있었고. 재미있게 잘 지냈지요(웃음).

남궁윤 선생님께서는 지난 2025년 5월 말일 퇴직하셨습니다. 서울대학교의 일상과 안전을 지키는 기전노동자로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지키는 노동조합 조합원으로서, 그리고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시민으로서 해주신 모든 일들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어디서 어떤 일을 하시든 행운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