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권 제2호) 남태령에서
남태령에서
덜컹. 머리를 단단한 것에 부딪는 불쾌한 감각과 함께 눈을 떴다. 휴대전화를 켜 보니 2024년 12월 21일 오후 12시 46분. 내 머리를 때린 것은 버스 차창이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지저분한 물때 너머로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걸고 집회를 하는 시위대가 보였다. 사회자인지 누구인지 마이크 든 사람이 “민주노총 해체하라! 주사파는 북한으로!” 라고 선창했다. 시위대 너머로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서울청사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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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핵 찬성측도, 반대측도 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고 했다.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촬영: 이일휘) |
창밖 풍경을 보니 목적지에 거의 다 온 듯하여 일행을 깨우려고 돌아보았다. 비서공 전 대표이자 당시 학소위(서울대학교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 운영위원장이었던 은세 동지, 당시 비서공 대표였던 채린 동지[1]가 각각 학소위 깃대와 비서공 깃대를 안고 있었다. 은세는 며칠 전 18일의 학소위 오픈마이크를 기획하고 기말과제를 병행하느라 아주 피폐해 보였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다른 사람들도 와 있을 것이지만, 일단 신림9동 차고지에서 501번 간선버스를 타고 여기까지 쭉 같이 앉아 온 것은 나까지 해서 이렇게 세 사람뿐이었다. 501번 버스의 기점이 서울대학교 근처에 있으면서 종점이 종로 한복판이기에 두 곳 사이를 오가기에는 최적의 교통수단이지만, 이날 이후로는 서울역 우회 때문에 늘 아침에 경찰과 서울시에서 발표하는 교통통제 상황을 살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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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12월 21일 낮, 종로구 사전집회 풍경. (촬영: 이일휘) |
목적지는 종로구 율곡로 2길, 주한일본대사관과 연합뉴스 사이의 골목길이었다. 학소위를 통해 제안받은 ‘탄핵너머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년·대학생 사전집회’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집회가 13시부터였고, 공시된 집결시간이 12시 50분이었으니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셈이다. 고층건물들 때문에 응달진 골목길은 어젯밤에 내린 잔설이 굳은 빙판이 군데군데 남아서 미끄러웠고, 건물들 사이로 매서운 바람이 불어051왔다. 집회는 폐박스를 재활용해 만든 크리스마스 트리에 윤석열 탄핵 이후 원하는 세상의 모습을 적어서 소원으로 다는 퍼포먼스, 민중가요 배우기 등의 구성이었다. 나를 비롯 기수들은 빙판을 조심하며 길가에 도열했다. 내가 채린에게 비서공 깃대를 건네받아 깃발을 달아 올렸고, 은세와 채린은 비서공 깃발보다 서너 배는 넓은 거대한 학소위 깃발을 올리느라 낑낑댔다. 나와 은세가 각각 비서공과 학소위 깃대를 들고 있다가, 중간에 은세가 기조발언 대독을 위해 앞으로 불려나가자 내가 깃대를 두 개 들고 쌍지팡이를 짚었다. 다른 참여자들 사이에 앉아있던 채린이 황당하다는 듯 다가와서 학소위 깃대를 빼앗아갔다.
12월 7일 여의도에서의 탄핵 촉구 집회, 그리고 12월 14일에서 다시 열린 탄핵 촉구 집회 이후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고 나서 앞으로 비서공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조직적인 상이 아직 마땅하지 않은 시점이었다. 전날인 20일, 앞으로 내가 매주 깃대를 들고 나가면 여력이 되는 사람들이 결합하게 하는 체제로 가자는 정도의 막연한 이야기만 나눈 상태였다. 실제로 그 구상대로 되기는 했다. 거기에 이날의 탄핵너머 사전집회를 계속 이어가자는 취지로 ‘퇴진너머 차별없는세상 전국대학인권단체연대(퇴진너머 대학연대)’가 1월에 만들어지면서 비서공과 학소위가 함께 이 연대체에 가맹했고, 이후 매주 사전집회와 본집회에 참여하는 일정이 확정되었다. 다만 그것은 해가 바뀌어 1월부터의 일이었고, 이때는 그저 춥다는 생각뿐이었다. 트렌치코트 아래 방한복을 입어서 사실 옷으로 가려지는 부위는 그다지 춥지 않았다. 다만 살갗이 드러나는 부분은 칼바람에 노출되어 있었고, 특히 발이 아주 시렸다. 아스팔트 바닥이 신발 밑창을 통해 열기를 앗아가서, 끊임없이 발가락을 꿈지럭대야 했다.
사전집회에 참여한 다른 학단위 사람들과 함께 본집회가 열리는 광화문으로 이동했다. 본집회는 15시부터였는데 사전집회가 14시 좀 052넘어서 끝났기에, 광화문에 들어오자 대오 정비 시간이었다. 이동 중에 한 외국인이 나를 보고 “프리 팔레스타인!”이라고 외쳤다. 비서공 깃발 아래 함께 달려 있는 팔레스타인 국기를 보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유 시리아군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우리 조국 얼마 전에 해방되었습니다.[2] 한국의 민주평화도 기원합니다”라고 덕담을 해 주었다. 웃으며 고맙다고 대답했지만, 내심 복잡한 마음이었다.
본집회 시간이 가까워지자 속속 다른 사람들도 도착했다. 관악여성주의학회 달에서도 깃대를 들고 합류했고, 채린의 학과 친구인 은우 씨(은세의 여동생)처럼 따로 소속이 없는 분들도 오셨다. 다들 대오 중간에 앉고, 나를 비롯해 기수들은 가장자리 폴리스라인 근처에 가 섰다. 그러던 도중 폴리스라인이 뒤로 확 밀려났다. 민주노총 대오가 진입하면서 경찰을 밀어낸 것이었다. 전 차선이 집회 장소로 열렸고, 기수들은 이에 따라 멀어진 가장자리를 따라 이동하면서 나머지 사람들과 떨어졌다. 나는 깃대를 짚고 대형전광판으로 집회를 지켜보았다. 기조영상 상영 후 밴드 ‘브로콜리너마저’가 올라와 노래를 불렀다. 첫 번째 노래는 〈졸업〉이었다. 참 우울한 노래를 트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넌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널 잊지 않을게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을 믿지 않을게
사실 나는 탄핵정국 4개월 내내 다소 우울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윤석열 정권을 이명박이나 박근혜 수준의 ‘진부하게 나쁜’ 보수053정권 정도로 생각하고 계엄 같은 초유의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던 오판도 한 이유였고, 술에 취해 누워있느라 12월 3일 심야에 여의도에 가지 못한 부끄러움도 한 이유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8년 전 박근혜 탄핵 때의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를 되새기며 이번에도 대개 그때처럼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듣는 이들이 힘 빠질까 봐 (그리고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주장을 해야 다르게 만들어나갈 수 있는 것이기에) 당시에는 이런 생각을 털어놓지 않았지만, 이 글이 지면상에 발표될 지금의 시점에 와서 사후적으로 회고하자면 정말 그 예상대로 되었다. ‘그때처럼’이라 하면 그것은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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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시경 본집회 대오의 은세와 채린. 일휘는 깃대와 함께 떠밀려서 저 멀리 뒤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
박근혜 파면을 축하하던 2017년 3-4월은 ‘촛불시민’들이 평화로운 촛불집회를 구가하던 광화문에서 3분 거리에 있던 비정규직 노동자 농성장이 경찰의 폭력침탈을 당하던 때였고,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서는 시흥캠퍼스 백지화를 요구하던 학생들의 대학본부 점거 농성장이 소화전 물대포 살수를 동반한 구사대 폭력에 짓밟힌 때였다. 2017년에 광화문 앞에서 고공농성했던 세종호텔 노조 고진수 지부장은 2025년054에도 명동역 앞에서 고공농성을 해야 했고, 2017년에 서울대학교에서 그러했듯 2025년의 동덕여자대학교 역시 대학본부의 비민주적 불통행정에 맞선 학생들이 폭력탄압과 법적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내 생각이 맞았다” 따위의 헛된 자랑을 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않기를 내내 바랬고, 그렇게 되지 않도록 목소리를 보태자고 집회에도 나갔다. 그럼에도 실망할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하고, 실망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졸업〉이라는 노래의 가사 자체가 그런 내용이다. 청년들은 각자도생을 위해 흩어지고, ‘미친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희망 따위는 귀를 씻고 들어도 찾을 수 없으며, 다만 ‘미친 세상’ 속에서 너만은 행복을 지키라는 가사. 이 노래는 2011년 서울대학교 법인화 반대 투쟁 당시 총장잔디에서 불렸던 노래였다. 법인화는 막지 못했고, 6년 뒤의 시흥캠 사태라는 폭탄을 잠재시켰으며, 대학의 영리추구와 대학 공동체의 파편화는 지금까지 가속적으로 진행되어왔다. 나는 〈졸업〉을 들을 때마다, 어떤 투쟁들은 세상을 내 뜻대로 바꾸기 위해서 하는 투쟁이라기보다 개개인의 노력으로는 거스를 수 없는 세상사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세상이 나를 바꾸지 못하도록 하는 투쟁, 승리가 아니라 더 나은 패배를 위한 투쟁이 된다는 생각을 한다. 찬 바람 맞으며 〈졸업〉을 듣고 있자니 2024-25년의 퇴진광장도 그런 투쟁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석열 탄핵광장은 박근혜 탄핵광장과 달랐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일부분 사실이긴 했다. 2016-17년에 단속과 검열의 대상이었던 깃대들이 이제는 자랑스러운 표현의 수단으로 재등장했고, 다양한 소수자들이 정체성을 드러내며 무대에 올랐다. 집회문화가 그때에 비해 성숙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보다 근원적인 데 가 있다. 광장이라는 말을 할 때,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광장과 정치적 광장은 055다르다. 정치적 광장은 평소에 ‘정치’에 무관심하던 절대다수 시민까지 광장에 나와야 비로소 열린다. 그 광장은 실체라기보다 하나의 정치적 현상·사건이다. 그래서 광장정치는 필연적으로 그 광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남김없이 다 합쳐지는 공배수의 정치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최소한 동의하는 공약수의 정치가 될 수밖에 없다. 공약수가 약분되면 나머지 소인수들은 필연적으로 흩어진다. 좀전에 마주친 시리아인을 보고 들었던 복잡한 마음도 그런 것이었다. 시리아는 소수민족 문제가 심각한 나라다. 아사드 독재정권 타도라는 공약수가 약분된 상황에서 시리아의 소수민족들은 어떻게 될까?[3]
한편, 물리적인 광장은 이 정치적 광장이 열리기 전부터 존재해 왔고, 닫힌 뒤에도 존재한다. 광장정치가 열리기 전부터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광장에는 이 사회로부터, 국가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소인수가 먼저 농성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광장정치의 주도권은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물리적 광장은 정치적으로는 골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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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분하게 큰 무대 오르신 ‘브로콜리너마저’의 보컬 윤덕원 동문(언론정보 01). 〈졸업〉을 부르는 모습이 전광판에 나오고 있다. (촬영: 임채린) |
◇
본집회가 끝나고, 행진이 끝난 명동에서 탄핵너머 사전집회 참여자들과 함께 식사를 한 뒤, 2차로 술집을 갔다. 채린을 비롯해서 다른 056사람들은 식사만 하고 먼저 귀가했다. 2차까지 따라간 서울대 사람은 나와 은세, 그리고 달에서 활동하는 주언 씨까지 해서 셋이었다. 다른 대학에서 활동하는 초면인 분들이 많은 자리라,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해 이러저러한 잡담을 각자 늘어놓았다. 나는 탄핵소추가 한 차례 실패 하고 12월 9일날 있었던 일의 재담을 풀었다.
어떤 곡절이었느냐, 여당을 규탄하는 내용으로 공동성명을 기하고 대자보를 부착하는데, 학부생 동지들은 모두 저녁 집회에 나가느라 내가 혼자 10장을 붙여야 했다. 사회대 신양관 벽면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이는 도중, 한 중년의 남성이 다가와서 말을 붙여왔다. 자기는 지금 재건축 공사 중인 사회대 16동 건물에서 작업반장을 하는 사람인데, 국회의 입법독재가 계엄보다 더 문제였다고 생각한다면서, 자기를 설득해 보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설득될 의지도 없는지라 상대하기도 피곤해서 내가 “예 뭐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요”라며 답을 회피하고 뭉갰다. 그러자 이 아저씨가 “대자보 붙이는 학생이라면 나같은 일반인 사회인들을 설득할 생각을 해야지!”라며 벌컥 화를 냈다. 자기도 “연세대학교 7n학번”이고, “젊을때 혈기로 이런 거 다 해 보았지만…….” 운운하던 그는 내가 끝까지 상대를 안 해드리자 “생긴 것도 이상하게 생겨가지고……”라 중얼대며 가버렸다. 요컨대 아닌 밤중 홍두깨로 외모 비하를 당했다는 실화에 기반하여 스스로를 낮추는 그런 영국식 유머였다.
그 밖에 더 풀 만한 썰이 있지는 않아서, 이후로는 다른 학단위 사람들이 주도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너무 양기가 넘치는 외향인들이셔서, 음침한 서울대인들은 그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기가 빨려 시들시들 죽어가기 시작했다. 비서공에서 애주가라면 1, 2위를 다투는 내가 술을 맥주 두어 잔밖에 못 마실 정도였다. 3차는 가지 말자는 눈빛을 은세와 서로 주고받고, 간간히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먼저 057귀가하신 분들은 잘 들어가셨는지, 뉴스는 새로 올라온 것이 없는지. 그리고 그 소식을 처음 접한 것도 이때쯤이었다. 서울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하던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트랙터 행렬이 남태령에서 가로막혔다는 소식이었다. 19시 20분 시각으로 긴급호소문이 올라와 있었다.
술자리가 파하니 21시 50분경이었다. 을지로에서 2호선을 타고 반시계 방향으로 돌았다. 주언은 달 깃대와 함께 중간에 내려서 귀가하시고, 나와 은세 둘만 남아 구로구를 지나 관악구로 접어들었다. 22시 13분경. 은세가 채린의 연락을 받았다. 귀가하지 않고 은우와 함께 남태령에 가 있다는 것이었다. 말없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은세는 채린과 연락해서 현장 상황을 파악하고, 나는 SNS와 뉴스를 뒤지기 시작했다. 경찰 차벽으로 가로막힌 모습에서 나는 내가 경험한 과거의 공간들이 연상되는 어떤 익숙함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있지 못했던 다른 여러 공간들도 떠올랐다. 가까이는 12월 3일 밤 여의도에 있지 못했고, 멀리는 2017년 3월에 관악캠퍼스 행정관에 있지 못했다. 내 어깨에는 비서공 깃대 가방이 걸려 있었다. 술도 그리 많이 마시지 않았다. “우리도 갈까요?”
과제 때문에 낮에 집회에 나오지 못하고 관악에 남아 있던 재현 동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22:26) “채린동지가 남태령 가있대서 우리 둘도 갑니다”
“서울대 또 누가 가잇대요?” (22:29)
(22:30) “은세동지 동생도 가 있고”
“?? 넷이 벌써 도착함?” (22:34)
(22:35) “창발적으로 모이게 됨”
“밤새 있을 건가요? 나 과제 끝나고 새벽에 갈까?” (22:35)
(22:38) “일단가보고”058
2호선 열차에서 집행위원 둘이서(즉 나와 은세) 즉석으로 집회 결합을 결의한 시각이 22시 25분경이었다. 깃대가 간다면 그것은 조직이 간 것이다. 지금 이 현장에 가서 우리의 깃대를 세워야 한다. 과거의 작위와 부작위들이, 즉 나와 우리의 역사가 내 등을 떠민다. 했던 일들에 부끄럽지 않도록, 하지 못한 일을 또 만들지 않도록.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놀랍도록 침착해졌다. 한편 은세의 옆얼굴은 다소 불안해 보였다. 나름 긴장을 풀어 주겠다고 시덥잖은 잡담을 꺼냈다.
“남태령 고개가 원래 이름이 ‘여우고개’인 거 아세요? 여우가 게으름뱅이에게 소가죽을 씌우고 무우를 먹으면 죽는 소라고 팔아먹었는데, 소가 되어 죽도록 고생한 게으름뱅이가 죽으려고 무우를 먹었더니 사람으로 돌아왔다는 설화가 있잖아요. 그 배경이 남태령이요. 관악산이 풍수지리적으로 아주 흉악하게 생긴 산이라, 이런 흉흉한 전설도 다 있는 것이지.”
“그 흉악한 산에서 우리가 지내는 거네요.”
“워낙에 음침한 애들만 모아놓아가지고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억누른다는 말도 있잖아요? 남태령의 또다른 이름으로는 ‘쉰너미고개’라는 이름도 있는데, 이렇게 사람 홀리는 천년 묵은 여우도 살고, 도적떼도 있고 해서 적어도 쉰 명은 동시에 모여서 넘어야 무사히 넘을 수 있다 그런 뜻이요. 남태령역하고 선바위역 사이 지나갈 때면 전력방식이 달라서 일시 단전된 상태로 관성으로 무동력 주행하는 구간이 있는데, 거기선 불이 다 꺼져요. 난 거기 지나갈 때마다 이 전설들을 생각합니다. 전등불이 다시 들어오기 전 그 어둠 속에 혹시 뭔가 도사리고 있을까.”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되었을까? 당사자만 알 일이다.
◇
신림역을 지나고, 봉천역을 지나고, 서울대입구역을 지나고, 낙성대역을 지나 사당역에 내렸다. 2호선 승강장을 벗어나 4호선 승강장, 059남태령 방면 가장 왼쪽 1-1번 스크린도어에 서 있는데, 갑자기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황당해서 뒤를 돌아보니 웬 노인분이 내 땋은머리를 잡아당긴 것이었다. 그는 오히려 억울해했다. 할 말이 참 많았지만 그런 데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곧이어 열차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남태령역에 내리니 22시 50분경이었다. 사당역에 비해 추웠다. 서울에 소재한 지하철역 중 가장 깊은 역이어서 햇볕에 달궈진 지열이 역사까지 전달되지 않아 여기는 낮에 와도 서늘하다. 남태령역 특유의 기나긴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싣고,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던 술기운을 찬 바람에 다 날려 보냈다. SNS상에 공유된 안내대로 남태령역 2번출구로 나왔다. 22시 54분. 나오자마자 경찰버스 한 대가 쌩하니 옆으로 지나가며 환영해 주었다. 그리고 저 멀리 앞에 경찰버스들이 10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깃대 가방을 고쳐 메고 오르막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얼마 못 가 경찰들이 우리를 가로막았다.
“왜 들어가십니까?”
“이 분(은세)의 동생들이 저 안에(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계셔가지고(팩트), 데리고 나가려고 왔습니다(언제 갈 것이라는 말은 안 했지만 아무튼 언젠가 데리고 귀가하긴 할 거니까 거짓말 아님).”
“미신고 불법집회입니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불법집회고 뭐고 나는 모르겠고, 사람 꺼내가려고 왔다니까요?”
“지금 그걸 믿으라는 겁니까? 들고 계신 거 시위용 깃발 아닙니까?”
“그럼 내 물건을 어디 갖다 버려요? 댁들한테 맡겨요? 나는 당신들 어떻게 믿고? 무슨 권한으로 민간인의 재산권과 이동권을 갖다가 이래라저래라요?”
화가 나서 대거리를 이어가려는데, 은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를 가로막았다. 별 수 없이 왔던 길을 돌아갔다. 남태령역 2번출구로 다시 내려가니, 복도 한 켠에 노란색 모래함이 보였다. 모래함을 060열어 그 안에 깃대 가방을 넣어보려 했지만, 대각선으로 넣어도 다 들어가지 않았다. 은세가 모래함 뒤의 벽을 가리켰다. 모래함이 아래가 좁고 위로 갈수록 넓어지는 모양이라 모래함과 벽 사이에 삼각형 틈이 있었다. 깃대 가방을 그 틈 속에 넣어 숨겼다. 깃대 자루가 다 가려지지 않고 삐죽 튀어나왔다.
“누가 안 훔쳐가겠지요? 훔쳐가면 이참에 깃대하고 깃발 새로 뽑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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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태령역 2번출구 모래함. 모래함과 벽 사이 틈에 깃대를 숨겼었다. 2025년 12월 21일 다시 찍은 사진. (촬영: 이일휘) |
다시 올라가서 아까 그 경찰들과 마주했다. 반코팅 목장갑 낀 손바닥을 보란듯이 들어보였다.
“자, 이제 됐지요?”
경찰들이 비켜섰다. 시선과 말투에서 비웃음이 느껴졌다. 우리가 그들을 지나쳐 오르막길을 계속 올라가자 등 뒤에서 다시 길이 닫혔다. 그렇게까지 해서 들어가볼 테면 들어가 봐라, 들어가서 무슨 일을 겪어도 자기들은 모른다, 그런 가학심이 느껴졌다. 그들 가운데 여경도 있었다. 여경의 존재 자체가 불길했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23시 01분, 인도로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우리의 오른편 차도로 경찰 네다섯 명이 회색 점퍼 입은 남성 두 명을 끌고 내려왔다. 061롱패딩 차림의 다른 사람들 두세 명이 그들을 쫓아가면서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댔다. 사람들은 경찰버스 사이로 사라졌다. 나중에 알았지만, 화학섬유식품노조 조합원들이 깃발을 올린 채 안으로 들어가려다 가로막히자 항의하는 과정에서 연행을 당한 것이었다. 휴대전화를 꺼내 재현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깃대 반입 금지와 여경의 존재, 연행자 발생을 알렸다.
“현장 상황 집행위 단톡방에 전해주실?” (22:44)
(23:05) “여기 너무 긴박해서 내가 할수가 X”
(23:05) “깃대 반입 금지 탄압당해서 남태령역에
숨기고 재진입 시도 중”
“않이 ;;; 진짜 충격이네 경찰이 검문하나” (23:06)
(23:08) (사진) “연행자 발생중”
“사람 수는 좀 많나요? 전체적으로 현장에” (23:09)
(23:09) “ㅇㅇ 전쟁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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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시경 연행자 발생 상황. (촬영: 이일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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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각사 해탈문 앞 대치 상황. (촬영: 이일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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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울타리 사이로 보이는 경찰버스와, 전봉준 투쟁단 깃발을 단 트랙터. (촬영: 이일휘) |
오르막길 왼쪽에 ‘정각사’라는 사찰로 통하는 길이 있다. 정각사 가람 해탈문 바로 앞에 고장난 공중화장실이 있는데, 그 부근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서 (해탈이 아니고) 아수라장이 나 있었다. 더 올라간 곳에 있는 연좌 현장을 드나들려는 사람들과 그들을 막는 경찰이 밀고 당기며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인도는 경찰들이 방패벽으로 막았고, 인도와 차도 사이에는 폴리스라인 바리케이드가 서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다. 아까 2번출구 앞 경찰들이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우리는 공중화장실 뒤로 돌아 숲속으로 들어갔다. 말라죽은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발 아래 버적버적 울어댔다. 인도와 숲 사이에 식재된 관목 생울타리 사이로 로더암에 ‘전봉준 투쟁단’ 깃발을 단 트랙터들이 경찰버스와 대치한 것이 보였다. 트랙터 한 대는 파란색이고, 나머지는 063빨간색이었다. 생울타리를 넘어가려 해 보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밟아 부러뜨리고 넘어가려고도 해 보았지만 보기보다 굉장히 억세서 부러지지 않았다. 숲 속을 통해 계속 올라가려니 올라갈수록 옆이 좁아져서절벽처럼 되는데, 캄캄한 환경 속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별 수 없이 다시 공중화장실 쪽으로 내려가려는데, 발 밑이 갑자기 허방다리처럼 푹 꺼졌다. 소리를 꽥 질렀다. 낙엽에 덮여서 땅바닥인 줄 알았던 것이, 숲 속 나무의 잔가지를 벌채한 뒤 쌓아놓은 적치물이었다. 썩어서 부러진 나뭇가지들 사이로 허벅지까지 쑥 들어갔다. 혹한의 겨울이라 진드기나 기타 독충이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은세도 어둠 속에서 나뭇가지에 이마를 긁혔다. 생고생 끝에 아까 거기로 돌아와 보니, 사람들이 생울타리를 양 옆으로 벌려서 개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연좌 대오 안에 합류했다. 23시 20분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채린을 찾아다녔다. 앞서 해산할 때 학소위 깃대 가방을 챙겨 갔던 채린은 비교적 고갯마루에 가까운 뒤쪽에 앉아 있었다.
“깃대는 어떡하셨어요?”
“들고 못 들어가게 해서 숨겨놓고 왔어요. 괜찮아요?”
“저는 괜찮아요.”
아직 멀쩡한 것을 일단 확인했으니, 정말 중요한 것을 물을 차례였다. 아까부터 느끼고 있던 ‘익숙함’의 정체를 후배 동지들에게도 공유해야 했다.
“여기 들어와 있으면 체포당할 수도 있어요. 그거 알고 들어왔어요? 정말 괜찮아요?”
“네!”
◇
합류를 하고 나니, 비로소 주변을 좀 둘러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사람들이 차도를 가득 메우고 앉아 있었는데, 오른편 가장자리에는 064서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길게 장사진을 서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게 자유발언 신청자들의 줄이었다. 보통 시켜도 안 하는 자유발언을 고갯마루까지 줄을 서야 할 정도로 너도나도 나선 것이었다.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뭐라도 하지 않으면 이 추위를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낮에는 산 아래에서 산 위로, 밤에는 산 위에서 산 아래로 바람이 부는 산곡풍이라는 것을 교과서에서나 보았지, 이렇게 몸으로 시리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남태령은 관악산과 우면산 사이의 고개이기 때문에, 두 산의 꼭대기에서 각각 불어내려온 바람이 만나서 고개 아래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온다. 심지어 이 날은 1년 중 해가 가장 짧은 동지이고, 체감 온도 영하 12도의 한파특보 상황이었다. 나중에 뉴스를 보고 알았지만, 실제로 저체온증에 걸린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얼어죽을 뻔했다. 아니, 경찰이 우리를 얼려죽이려 했다. 거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미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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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12월 21일 23시 25분 남태령, 차벽 안 대치 현장. 사진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들이 모두 발언 줄이다. (촬영: 이일휘) |
우리가 대오에 들어가기 전 22시 15분경 이런 발언이 있었더랬다.
발언자: 여러분, 경찰의 별명이 뭡니까!
플로어: 짭새!!
발언자: 아니, 그거 말고;; 민중의 지팡이 아닙니까?!
전농 유튜브에서 라이브 다시보기 기능을 켜두지 않아 전체 발언을 이제 찾을 수 없는데, 아마 그 발언자는 경찰이 민중의 지팡이 노릇을 제대로 못 한다고, 그 노릇을 제대로 하라고 비판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바쿠닌이 말했듯이, 민중을 줘패는 지팡이를 이름만 ‘민중의 지팡이’라고 붙여 봤자 민중의 기분이 유쾌할 리가 없다. 〈연대투쟁가〉 가사에도 나오듯이, 경찰(그리고 군대)은 본질이 폭력집단이다. 국가가 독점한 폭력을 직접 수행하는 말단으로서 군경과 같은 물리력이 있는 것이다. 비상계엄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부터 일각의 사람들은 “작전 수행에 소극적이었던 군경”의 기여를 평가해야 한다고 떠들었다. 윤석열을 파면한 헌법재판소 선고문에도 그런 내용이 들어갔다. 글쎄, 군경이 소극적이었다면 12월 3일 밤 국회 공무원들의 손가락은 누가 다 부러뜨렸을까? 경찰청장과 서울청장이 나란히 구속당해서 명령권자도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경찰은 왜 우리를 얼려죽이려 했을까? 나는 머리가 없어진 조직이 늘 해오던 대로 반사적으로 움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찰은 ‘시민’이 다수인 집회에 대해서는 유화적이지만, ‘노조’나 ‘농민회’에 대해서는 언제나 ‘지팡이’의 손잡이가 아닌 촉끝을 들이대 왔다.
아니, 사실은 ‘시민’에 대해서도 유화적으로 굴게 된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그것은 박근혜 정권 시절 백남기 열사가 경찰의 물대포 직사살수를 당해 쓰러져 돌아가신 일을 비롯해, 집회·시위에 대한 노골적인 국가폭력이 횡행했던 시기가 있었기에 2017년 박근혜 탄핵 이후 066반작용이 일어났던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는 본질적으로 폭력적이고 그것을 바꾸지 못했으니 투쟁이 무의미했다는 뜻은 아니다. 적어도 이제는 인도를 따라 행진하는 시위대를 경찰이 밀어서 차도를 밟게 한 뒤 교통방해죄로 체포하고, 집에 가겠다는 시위대를 방패벽으로 못 가게 막고 있다가 해가 지면 야간집회는 집시법 위반이라고 체포하고, 그런 일은 없게 되었다. 모두 투쟁해서 얻어낸 성과다. 그러나 그 성과로 ‘일반 시민’들이 공권력의 위협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한편, 여전히 그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존재들이 있으며, 이는 정권을 가리지 않는 공권력의 본질적인 문제다. 노조나 농민회와 함께 움직이는 시민은 ‘시민’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폭력적 진압의 대상으로 되는 현상을 우리는 남태령에서, 윤석열을 탄핵한 이후에도, 그리고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누차 목격했다.
2018년 산업재해로 돌아가신 김용균 열사의 1주기 무렵, 주말마다 대정부 투쟁이 있었다. 그때도 기말고사 기간 겨울이었는데, 11월 30일 청와대에 도달 못하고 효자동 동사무소 앞에서 노조 대오가 막혔다. 길이 막히자 가장 앞에서 횃불을 들고 가던 노조원들이 횃불을 아스팔트 바닥에 모닥불처럼 내려놓았다. 그러자 경찰이 뛰어들어와 소화기를 뿌렸다. 위험할 수 있으니까 소화행위 자체는 양보해서 이해한다 치자. 문제는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소화기를 뿌리니, 나를 비롯해서 대오 앞에 있던 사람들이 소화기 분말을 잔뜩 마시고 말았다. 소화분말이 자욱해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경찰과 시위대가 뒤엉켜 싸우고, 배경음악으로 깔려 고막을 때려대던 〈민중의 노래〉(뮤지컬 말고)와 사람들의 비명소리 사이로 마이크 든 사회자의 “촛불의 명령이다, 노동개악 폐지하라! 촛불의 명령이다, 비정규직 철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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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11월 30일 경찰의 소화기 선물. (촬영: 이일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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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12월 6일 청와대 앞. 나중에 알았지만, 바로 앞에 계신 분이 김용균재단 이사장 김미숙 어머님이셨다. (촬영: 이일휘) |
트렌치코트에 묻은 소화분말을 아무리 털어내도 다 없어지지 않는데, 단벌이라서 드라이클리닝을 맡기면 학교에 입고 갈 옷이 없었다. 067결국 참담한 몰골로 등교하니 그날 교양강의가 ‘유토피아의 역사’, 세상을 좋게 만들어 보자는 이런저런 시도들의 역사에 관한 강의였다. 거의 마지막 주차가 되어서 최신동향이라고 기본소득과 기초자본을 다루었는데, 내가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취지로 질문을 했다. “기본소득은 어느 정도 이해하겠다. 하지만 기초자본의 경우에는 보편적 지급에 무리가 있고, 선별적으로 지급했을 때는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한 대중들의 의구심을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실제로 감독이 이루어진다면 국가권력이 비대화되고 감시권력화될 것이 우려된다.”
교수자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우리나라는 위대한 촛불혁명을 이루었기 때문에 중국처럼 그렇게 될 걱정이 없습니다.”
◇
남태령이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의미에서 하나의 학교였다는 사실은 지난 1년 사이 많은 사람들이 이미 많이 이야기하였으므로, 내가 보잘것없는 글솜씨로 자세히 부연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도 068간단하게만 언급하자. 트랙터 행진의 주체였던 전농과 전여농(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으로서는 농민들에게 양곡관리법이 왜 필요한지 대오의 ‘시민’에게 알릴 수 있었다. 그리고 발언에 나선 ‘시민’ 각자도 얼마나 다양한 정체성의 소유자로서 자신을 위해 세상이 어떻게 변하기를 원하는지 공유하고 공유받았다. 광화문 집회에서도 많은 시민이 무대에 올라 발언을 했지만, 집회 기획 과정에서의 사전 검수와 조율이 없을 리없다. 물론 그러한 기획노동의 가치를 폄하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남태령은, 어떠한 사전 조율 없이 창발적으로 모인 자리라 기획이 따로 있을 수 없는데도 혐오·야유 같은 돌발사태 없이 각자의 투쟁의 의미가 지금 이 시간·공간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토로하고 모두가 박수를 받는 자리는 그야말로 재현될 수 없는 기적이었다(쓸데없이 길어서 시간을 다 잡아먹는 정치인들의 발언이 없어서 좋았음도 물론이고 말이다).
앞서 ‘광장정치’의 본질적인 문제를 언급했는데, 사실 그것은 광장정치의 한계라기보다 ‘다수의 지배’로서 민주주의의 한계이기도 하다. 공약수 의제가 달성되면 흩어지고 그 이후 남은 소인수들에게는 무관심해지는 광장은 다수를 만들기 위해 합의를 거듭하는 민주주의 그 자체의 표상이다. 하지만 광장이 필연적으로 흩어지듯이,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다수는 유지될 수 없다. 때로 강자와 약자 사이의 중간점을 ‘합의’로 요구할 때 민주주의는 부정의하기까지 하다. 제도가 된 민주주의는 부정의하다. 민주주의가 제도라면 나는 반민주주의자다. 버트런드 러셀은 『자유로 가는 길』에서 사회의 개별 부문에 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전체 국민의 투표로 성립된 정부나 의회가 개별 부문에 개입하는 것의 부당함을 이야기했다. 대중을 무시하는 엘리트주의적인 말처럼 오해받을 수 있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 그것은 요컨대 인식론적 주권의 문제다. 2009년 쌍용차 사태 때, 사측과 경찰이 노조원들을 말려 죽이려고 전기를 끊자 노조는 페인트가 굳어서 공장이 망가질까봐 069사측보다 더 애태우며 발전기를 돌렸다. 이 공장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 공장을 가장 사랑한 사람은 그 노조원들이었다. 그 점거를 함부로 진압할 권한은 설령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라 해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2024년 동짓날 남태령의 주권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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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22일 02시경 트랙터 행렬. (촬영: 이은세) |
골목의 어두움과 협소함을 부끄러워하며 광장으로 나가기를 끊임없이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앞서 물리적 광장은 정치적으로 골목이라고 표현한 것이 냉소나 비관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골목이——또는 다른 표현으로 ‘현장’이, ‘당사자성’이 있다. 골목의 주권자로서 자신의 영토인 골목을 지켜내고 넓혀가며 다른 골목들과 만나는 일련의 움직임이 바로 투쟁이고 운동이며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다. 남태령에서 오간 이야기들의 다양성은 그 자체로 이 ‘시민’들이 단일하지 않다는 것을 방증했다. 같은 비유로 다시 070말하자면, 남태령은 정치적으로 ‘광장’이 아니었다. 그곳은 거기 있는 사람의 수만큼 많은 ‘골목’들이 만나고 교차하는 거대한 합(conjunction, 천체들이 천구상에서 가까이 만나는 현상)이었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전설로만 들었던 1968년 동경대학 해방강당의 모습이 바로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 나는 더 이상 일본인들이 부럽지 않다.
◇
어느새 날이 바뀌어 01시 30분, 경찰버스가 뒤로 빠졌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고개 아래로 대오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01시 정각 무렵 과제를 제출해서 택시를 잡는 중이라는 재현에게 가능하면 깃대를 회수해서 대오에 진입해 보라고 말해 두었는데, 상황을 보니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 01시 40분, 나는 대오에서 이탈해서 남태령역 2번출구를 향해 질주했다. 계단을 달려 내려가 모래함 뒤에 숨어 있는 깃대 가방을 꺼냈다. 급하게 은세에게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냈다. “깃대 회수!!”(01:46) 혹시라도 경찰이 변심해서 다시 기어올라올까 봐, 가방에서 깃대를 꺼내 깃발을 달면서 동시에 오르막을 뛰어올라갔다. 목장갑 때문에 매듭이 잘 묶이지 않아서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깃발을 달았다. 차가운 탄소섬유 깃대를 잡고 깃발 끈을 매듭지으며 고갯길을 뛰어올라가니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일행과 재합류해서 보니 손가락이 얼어서 마디마다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정신이 들자 손이 아파 도저히 깃대를 잡고 있을 수가 없어서 채린에게 깃대를 떠넘기고 급하게 핫팩을 얻어 손을 녹였다. 경찰들이 다시 올라오지는 않았기에 괜한 생고생을 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때는 한시라도 빨리 깃대를 되찾아와서 세워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02시경, 택시 타고 온 재현이 합류했다. 재현은 우리가 살아 있는지 확인만 한 뒤 신출귀몰하게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말고도 현장에 서울대 사람들이 더 있었고 그들을 만나고 071다닌 것이다. 그중 한 분이 캄캄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휘날리는 비서공 깃발 사진을 찍어 주었는데, 사진 한켠에 이지러지는 달이 조그맣게 찍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몇 시간 전 화섬노조 조합원들이 연행당하는 것을 목격한 직후 은세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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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태령에 세운 비서공 깃발. (촬영: 레마) |
남태령역 2번 출구에서 오르막을 올라가는 초엽을 막 지나면 버스회사 차고지가 있다. 차고지가 탁 트여 있기에 그 위로 하늘도 탁 트였는데, 날씨가 극심히 추운 대신 구름도 미세먼지도 없어서 시릴 정도로 맑았다. 그만큼 별이 너무 밝게 보였다.
“오리온자리가 보이네요.”
“저게 오리온인가요?”
“네. 장구 모양 보이지요?”
“그럼 오리온에서 가장 밝은 게 베텔게우스인가요?”
“오른쪽 아래 하얀 별? 그건 리겔. 대각선 맞은 편의 두 번째로 밝 은 빨간 별이 베텔게우스. 거기서 쭉 아래로 내려오면 하늘 전체에서 가장 밝은 큰개자리 시리우스. 왼쪽의 작은개자리 프로키온까지 해서 072겨울의 대삼각형. 그런데 은세 동지는 어느 별이 베텔게우스인지 모르 면서 이름은 어떻게 또 알아요?”
“노래 제목…….”
“아. 그거 좋은 노래긴 해요.”
그 대화를 떠올리며 깃대 끝을 올려다보자 겨울의 대육각형의 다른 구성원들도 보였다. 마차부자리 카펠라, 쌍둥이자리의 폴룩스와 카스토르, 황소자리 알데바란. 알데바란에서 조금 옆으로는 플레이아데스가 희미하게 가물거렸다. 동남쪽에 시리우스만큼 밝은 별이 하나, 서남쪽에 시리우스보다 밝은 별이 하나 있었는데 각각 화성과 목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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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12월 21일 밤, 아무도 없는 남태령을 찾아가서 찍어온 밤하늘. 하늘 왼쪽에 혼자 엄청 밝은 목성이 1년 전에는 저기 말고 다른 데 있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때와 같은 모습이다. (촬영: 이일휘) |
별하늘은 겨울에 가장 화려하다. 그것도 낮이 짧고 밤이 길수록 화려해진다. 대육각형의 중심인 베텔게우스가 동짓날 자정에 정남쪽 073가장 높이 뜨기 때문이다(사실 한국 표준시각이 일본 자오선 기준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일본보다 30분 늦은 동짓날 0시 30분에 이 현상이 일어난다. 한국에서 0시에 베텔게우스가 가장 높이 뜨는 날은 동짓날보다 1주일 늦은 12월 29일경이지만 대충 넘어가자). 해가 가장 짧고 어둠이 가장 깊고 추위가 가장 매서울 때, 베텔게우스는 낮에 해가 있을 곳에서 해를 대신해 빛난다. 별이 아직 사람에게 의미가 있었던 먼 옛날, 베텔게우스와 그 주변의 밝은 별들은 빛이 어둠에 잡아먹히지 않는다는 약속과 같았다. 그렇다고 이 가장 긴 밤이 지나면 다시 태양의 빛이 찾아오리라, 그런 구태의연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나는 차라리 거기서 압도적인 빛으로 낮을 지배하던 태양의 구차한 몰락을 생각했다. 태양은 사실 우주 전체에서 보면 별 대단할 것도 없는 천체다. 그런 주제에 거짓된 질서로 낮을 지배하던 태양은 마치 탄핵되어 실추된 권력과 같이 땅속 가장 깊이 수치스럽게 숨고, 경찰 공권력은 단전되어 불 꺼진 채 남태령 지하를 통과하는 지하철 4호선 열차처럼 관성으로 폭력을 휘두를 때, 국가가 실종되고 법과 제도는 오히려 사람들을 동사의 위험으로 내모는 바로 그 밤의 순간에, 베텔게우스와 대육각형은 태양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태양보다 두 배나 높이 당당히 떠올랐다.
◇
대오가 다시 멈춰섰다. 경찰 차벽이 사당 방면으로 물러나기만 하고 재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다시 앉았고, 다시 발언하고, 다시 일어서고, 다시 행진하고, 다시 노래했다. 길 왼편으로 수도방위사령부가 보이기 시작한 03시경, 비서공 깃대를 돌려받았다. 채린이 학소위 깃대를 올려도 된다는 은세의 허락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깃발 흔들기를 좋아하는 채린은 그 커다란 깃발을 정말 잘도 흔들었다. 그때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지만, 은세가 이 때 정말 길고도 깊은 고민 끝에 깃대를 올렸다는 것을 나는 『물까치』 창간호 원고를 받아보고 074피드백하는 과정에서야 알았다. 책임의 무게를 알고 고민할 줄 아는 리더를 갖는다는 것은 조직원으로서 행복한 일이다. 채린 역시, 좀 전에는 한 순간의 고민도 없이 “네!”라고 대답했지만, 나와 은세가 도착하기 전까지 2-3시간 동안 어떻게 고민이 없을 수 있었을까. 그동안 충분히 고민을 거듭했기에 그 대답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떨어진 것이었을 터이다(본인한테 물어보니 정말 아무 생각 없었다고 합디다만).
이후로는 추위와의 싸움의 반복이었다. 〈민중의 노래〉가 신청곡으로 들어오자 전농에서 “어둠에 찬 반도의 땅 몰아쳐라 민중이여”로 시작하는 그 노래를 틀어준 일이라거나, 04시경 최도은 민중가수가 등장해서 파워풀한 라이브로 〈불나비〉를 부르는 등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우리로서는 체력적으로 점점 지쳐가서 버티는 것 외에 뭔가 특기할 만한 건 더 없었던 게 사실이다. 특히 나는 전날 낮부터 시렸던 발이 문제였다. 이제는 슬슬 발가락에 감각이 없었다. 슬금슬금 고개를 내려온 대오가 남태령역까지 도달한 08시경(25분만에 올라간 고개를 8시간 40분만에 내려온 셈이다), 우리 다섯 사람은 이미 파김치였다. 이미 많이 알려져서 낮이 밝으면 사람들이 몰려올 테니 이 상태로 억지로 더 붙어있는 건 객기다, 다른 사람들에게 합류를 부탁하고 우리는 귀가해서 정비를 하자, 그런 합의에 도달했다. 먼동이 터오는 동북향 하늘을 배경으로 깃발을 들고 활동보고용 기념사진을 찍었다. 남태령역 4번출구로 내려가니 역사 안에 밤새 배달된 갖은 물품들이 마치 전쟁터의 보급품처럼 쌓여 있었다.
우리가 대오 안에 앉아 있을 때부터 인터넷을 통해 이곳 사정이 여기저기 알려져 도움의 손길이 찾아왔다. 식음료를 배달 보내는 것은 기본이었고, 남태령 근처의 세차장 사장님은 이거라도 보온에 보태라고 극세사 수건을 잔뜩 보내 주었다. 사실 길이가 짧아서 목도리 삼기도 애매하고 하나만 가지고 있어서 크게 도움이 되는 물건은 아니었다. 075하지만 모두들 이 수건을 한 장씩만 챙기고 다음 사람에게 넘겼다. 내가 두 장, 세 장 챙겼다가 혹시라도 모자라서 못 챙기는 사람이 있을까봐. 남태령의 마음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곁을 함께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과 그들의 안위에 대한 우려, 그리고 나와 우리의 안위를 해하는 적에 대한 분노와 증오. 그것은 하나이지 결코 둘이 아니었다. 우리는 크로포트킨이 말한 상호부조를 보고 또 겪었다. 시베리아의 어느 호수를 공유하는 갈매기와 물떼새와 오리들처럼 함께 추위를 견뎠고, 그래서 살아남아 고갯길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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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그 극세사 세차타올. (촬영: 이일휘) |
그렇다고 이 글을 온 세상이 마땅히 남태령과 같은 아름다운 상호부조의 장이 될 것이라는 식의 낭만화된 승리의 기억으로 마무리할 생각은 내게 없다. 누차 언급한 대로 남태령 대치는 재현될 수 없는 기적 같은 것이었다. 두 번째 남태령이 있었고, 세 번째로 석수역 대치도 있었지만, 그 사건들은 모두 첫번째 남태령의 기억에 크게 의존했다. 반면에 첫 번째 남태령은 전례를 찾을 수 없는 하나의 균열이었다. 물론 기적이 두 번째, 세 번째로 계속 이어져서 그것이 더 이상 기적이 아니라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윤석열 탄핵광장이라는 전체적인 그림을 보았을 때 남태령은 하나의 예외적인 사건이었고, 광장정치의 본질적인 한계라는 것을 극복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어떤 배신의 결과로 승리를 도둑맞은 것이라기076보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에 내재된 한계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기서 필연적으로 흩어질 광장 이후의 골목들의 투쟁에 귀중한 자양분이 되어줄 무엇인가 중요한 것들을 얻었다. 표로 환원되거나 존재가 약분될 수 없는 서로를 확인했고, 재현 불가능하기에 더욱 소중한 찰나의 기억을 얻었다.
◇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남태령역 승강장으로 내려가다가 반대로 올라오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도 그들도 모두 말이 없었다. 사당역에 내려 보니 버스정류장에 “남태령 트랙터 도로 점거중 수원 화성방향 지하철(2, 4호선) 이용하세요”라는 안내문이 붙었는데, 누가 ‘트랙터’와 ‘도로 점거중’에 X표를 치고 “경찰이 점거중”, “경찰이 점거함 >:(” 이라고 낙서를 해 놓았다(혹시나 싶어서 말인데 내가 한 게 정말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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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모를 어느 시민이 남긴 낙서는 단순한 감정의 배설이 아니라 이 종이가 붙어 있는 그 짧은 시간마저도 놓치지 않으려 했던 기억의 투쟁이다. (촬영: 이일휘) |
채린과 은우는 기숙사로 가야 해서 낙성대역에서 내리고, 재현은 학교에 들러야겠다고 서울대입구역에서 내리고, 은세와 둘이 신림9동의 어느 국밥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먹는 내내 둘 다 말 한마디 할 기력도 없었다. 남태령에 후속 합류할 회원들에게 깃대를 넘겨주고, 집에 들어가 기절했다. 13시 30분경에 눈을 떴는데,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갔다. 하지만 억지로 몸을 일으켜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팔레스타인 077긴급지원모금 포스터의 대체텍스트를 작성하고, 관악캠퍼스 노동자 휴게실 전수조사에 쓸 조사지의 가안을 만들었다. 남태령에서 찍어 온 사진들을 외화하기 위해 정리하고 공유도 해야 했다. 사진들을 정리하는데, 해산 직전 촬영한 기념사진에 공교롭게도 좌회전하면 서울대로 간다는 내용의 교차로 이정표가 함께 찍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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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12월 22일 05시 40분, 머리 위의 “좌회전 서울대” 표지판. (촬영: 임채린) |
아까 남태령은 하나의 합(合)이라고 했다. 하지만 합구필분(合久必分)이라는 말이 있듯이, 합 역시 흩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흩어짐은 ‘광장’의 흩어짐과 무엇이 다른가? ‘광장’이 최대공약수의 장이라면, 태령에서의 경험은 하나의 최소공배수였다. 최소공배수는 곱셈에 참여한 모든 소인수를 품고 있는 가장 작은 배수다. 그것은 각자의 당사자성이 침해되지 않으면서 하나로 묶일 수 있다는 최소한의 연대의 기억이었다. 탄핵광장의 흩어짐은 최대공약수의 약분으로 연결이 해소되면 심해지는 것이지만, 남태령에서의 흩어짐은 그 최소공배수를 가지고 각자의 골목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인수를 곱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골목의 주권자로서 자신의 일상에 이식하는 것이다. 나의, 우리 비서공의 ‘골목’인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듯 왼쪽으로 꺾인 화살표는 약분되지 않는 우리 자신을 가지고 우리의 078골목으로 돌아가 그 현장을 주체적으로 재구성하는 골목의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라는 명령이다. 관악캠퍼스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 좋았던 일이나 슬펐던 일이나 안타까웠던 일들이 뉴스를 통해 듣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영토에서 일어난 나의 일이라는 것을 재확인하는 선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민중가요 중 하나는 금속노조의 주제가(?)인 〈금속노조가〉다. 특히 좋아하는 가사는 이 부분이다. “나가자 성벽을 깨고 죽음의 사선을 넘어”. 이 가사는 성벽을 깨고 성벽 안으로 쳐들어 가자고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성벽 안에서부터 성벽을 깨고 그 밖으로 나가자고 말하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물론, 최악의 권력자를 성탑 위에서 끌어내리고 그보다는 나은 성주를 새로 세우는 것도 유의미한 일이다. 그렇다기보다 그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에 가깝다. 그러나 이 성벽이라는 것이 권력이 마비된 상태에서도 저절로 움직여 우리를 위협하는 고장난 거신병이고, 서로의 골목이 교차하지 못하게 가로막아 안주하게 만드는 숨막히는 유리온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승리가 새로운 성벽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주권자가 되어 부단히 성벽을 깨고 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남태령에서 우리의 골목으로 가져온 교훈이며, 우리 비서공 집행위원들 외에도 남태령을 겪고 각자의 골목으로 돌아간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예외적인 기적을 경험했고, 이제 그 경험을 통해 그전과는 달라진 시야를 가지고 돌아간 각자의 골목에서 남태령의 기억을 자기 현장의 일상적 언어로 번역해내야 한다. 그러는 가운데 누군가의 골목이 또다른 합이 일어나는 ‘남태령’이 된 것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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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무를 어찌어찌 마치고 다시 기절한 뒤 깨어 보니 12월 23일이었다. 06학번 선배님이 내가 남태령에 다녀왔다는 것을 알고 기특하다079고 술을 사 주겠다고 불러냈다. 서울대입구역 근교의 링고 2호점에서 맥주로 1차를 하고, 선배님의 사무실로 이동해서 위스키·럼·증류식 소주 등 고도주로 2차를 했다. 너무 많이 마신 나머지 쓰러져 잠들어서 다음날 혼자 일어난 뒤 민망하여 설거지라도 해드리고 나갔는데. 아무튼, 그 약속을 위해서 신림9동에서 출발하기 전에 24시간 카페 파머스빈(이제는 컴포즈커피로 바뀌어 버렸다)에서 과제로 밤을 새우는 재현을 발견해서 “나는 술 먹으러 간다”고 우롱하였다. 그리고 사실 그 전에 은세를 먼저 만났다. 은세가 학사논문 참고문헌으로 쓸 『이와나미 일본근현대사』를 빌려주기 위함이었다. 은세를 만나기 전, 잠시 뒤의 술자리에서 얻어먹기만 하기 민망하여 제과점 피에스몽떼에서 안주로 슈톨렌을 몇 개 샀는데, 책들을 빌려주면서 가방 안에 슈톨렌 한 개를 함께 넣어 주었다. “이 작은 거 누구 코에 붙이겠냐, 딴 사람들 주지 말고 동생분 그리고 채린하고만 나눠 먹으라”고 당부했다(혹시나 해서 언급하지만 재현은 원래 단 것을 먹지 않는다).
나야 하루만에 술안주로 탕진했지만, 슈톨렌은 원래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겨우내 아껴먹는 ‘기다림’의 빵이다. 비서공에서의 활동은, 즉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라는 골목을 가꾸는 것은 그 기다림의 과정이기도 하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투쟁적 정세에 대한 기다림, 새로이 찾아올 사람들에 대한 기다림, 그리고 이 순간 이 조직에 일시적으로 모여 있다가 졸업하면 흩어지게 될 사람들과의 재회에 대한 기다림. 나는 이 흩어짐을 남태령에서의 흩어짐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려 한다. 원래의 골목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골목을 찾아 떠나는 것이라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 남태령에서 얻은 것을 각자의 골목으로 가지고 돌아가 확산하듯이, 이 활동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생애주기의 새로운 골목으로 가지고 떠날 것이라는 점에서 같다. 교정이라는 골목은 결국은 모두들 졸업하여 차례차례 떠날 수밖에 없으나, 그 졸업이 080브로콜리너마저가 적확하지만 우울하게 부르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더 나은 패배’ 그 너머의 것이기를, 연대의 최소공배수를 품고 당신의 새로운 골목에서 그 현장을 주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주권을 행사하기를. 그렇게만 한다면, 당신의 골목과 우리의 골목은 그것이 언제가 되든 반드시 다시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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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12월 22일 08시경, 먼동 터오는 동북쪽 하늘 배경으로 기념사진. 남태령에서의 합이 감동적이지만 일시적인 만남일 수밖에 없듯, 우리가 비서공에 모여 있는 매 순간도 그때마다 달라지는 멤버들의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만남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헤어지고 나서도 여기서 얻은 것이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흩어진다면,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날 것이다. “투쟁!” (촬영: 이은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