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권 제2호) 기획좌담: 돌아보며 함께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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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좌담:

돌아보며 함께 가는 길

이예인

금속노조 법률원 변호사

(전) 사회학과학생회 비서공 파견인
(2018년 3월 - 2019년 1월)

(전) 비서공 집행위원
(2019년 1월 - 2020년 2월)

(전) 비서공 제2대 집행위원장
(2019년 1월 - 2020년 2월)

이예인

금속노조 법률원 변호사

(전) 사회학과학생회 비서공 파견인
(2018년 3월 - 2019년 1월)

(전) 비서공 집행위원
(2019년 1월 - 2020년 2월)

(전) 비서공 제2대 집행위원장
(2019년 1월 - 2020년 2월)

이은세

비서공 연대회원

(전) 비서공 집행위원
(2021년 10월 - 2025년 2월)

(전) 비서공 제4대 학생대표
(2022년 2월 - 2024년 3월)

(전) 서울대 학소위 비서공 파견 운영위원 겸 운영위원장
(2024년 1·2학기)

이은세

비서공 연대회원

(전) 비서공 집행위원
(2021년 10월 - 2025년 2월)

(전) 비서공 제4대 학생대표
(2022년 2월 - 2024년 3월)

(전) 서울대 학소위 비서공 파견 운영위원 겸 운영위원장
(2024년 1·2학기)

최인영

민주노총 법률원 변호사

(전) 비서공 집행위원
(2018년 3월 - 2021년 1월)

(전) 비서공 제3대 집행위원장
(2020년 2월 - 2021년 1월)

최인영

민주노총 법률원 변호사

(전) 비서공 집행위원
(2018년 3월 - 2021년 1월)

(전) 비서공 제3대 집행위원장
(2020년 2월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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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21일 19시 경향신문사 근방. 관악에서 출발한 두 사람이 칼바람을 맞으며 약속 장소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501번 간선버스에서 내린 것은 20여분 전이었지만, 마땅히 식사할 곳을 찾지 못해 시간이 지체되었다. 어쩔 수 없이 아무 데나 들어가서 급하게 저녁을 먹는 와중, 메시지가 왔다.

“혹시 질문지가 준비되어 있는가요?”

간사 미리 질문을 정해서 그 틀에 담화를 가두기보다, 최대한 프리하게 진행해서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따로 준비하지는 않았습니다……라고 답장했어요.

은세 …….

간사 그런 걸로 해요.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치고 약속장소로 서둘러 올라가 보니, 부탁받은 대로 노조 조끼로 TPO를 맞춘 게스트 두 사람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간사는 호스트가 되어서 게스트를 기다리게 한 결례를 사과하며 급하게 녹음과 촬영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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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공 3대, 만나다

간사 누추한 기획에 응해 주신 귀한 세 분께 감사부터 드립니다. 우선 오늘 좌담이 실릴 우리 비서공 문집 『물까치』 창간호 한 부씩 드리겠습니다. 두 분 섭외하면서 좌담 상대인 은세 전 대표 글은 미리 읽어주십사 보내 드렸는데, 읽어 보시니 감상이 어떠셨는지? (은세 보고) 우와, 표정 봐.

은세 도망가고 싶어지네요.

간사 그래서 안쪽에 앉혔잖아요. 도망 못 가게.

예인 네, 읽었어요. 엄청 길게 쓰셨던데?

인영 저는 자세히 못 읽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은세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간사 감사할 일이에요?

예인 (인영 보고)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요. 나돈데. 이실직고해야 하잖아.

인영 항상 진실되게 사셔야죠. 왜 거짓말을 하세요.

은세 너무 좋아요.

예인 이거 학내에 비치하신 거예요?

간사 돈 없어서 많이 인쇄하지는 못했어요. 1쇄는 50부 뽑아서 이렇게 개별적으로 드리고.

예인 그래서 오늘 자리의 취지가 뭐라고요? (일동 웃음) 한줄요약?

간사 제가 오늘 변호사들 보러 간다 그러니 주변에서 다들 “뭘 잘못했냐”, “누구 때렸냐” 그러긴 합디다만, 제 법률상담 받자고 바쁜 분들 이리 뵙자 한 것은 아니고요.
095각자 자기가 비서공 했던 시절에 어땠는지 썰도 풀고 비교도 해보고, 그리고 요즘은 어떻게 뭘 하고 지내시는지. 약간 술자리 노가리 느낌으로 프리하게? 사실 이 자리 자체를 녹두호프에서 했어야 마땅할 것이나 녹홉이 최근에 슬프게 되어서…….
그러고 보니 제가 인영 변호사는 녹홉 이모님 칠순잔치 때 뵈었지만 그때는 종업원과 손님으로 만나 제대로 대화할 상황이 아니었어서 오늘이 사실상 초면이고, 예인 변호사와 은세는 서로 아예 초면이지요? 뒤늦었지만 돌아가며 자기소개부터 할까요?

은세 2021년 하반기부터 비서공 활동 시작해서 2025년 2월 졸업할 때까지 집행부원으로 있었고, 22년부터 23년까지는 학생대표 맡았습니다. 25년 졸업 이후 지금 서울대 로스쿨 1학년 다니고 올해 봄에 2학년 올라가는 이은세라고 합니다.

초면인 관계 두 쌍을 포함해서 쑥스러움 속에서 시작되는 좌담. 그러나 이 좌담이 어떤 분위기로 끝날지 이때는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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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영 2018년에 사회대학생회에서 비서공 출범논의를 했어요. 노학연대라는 게 왜 필요한지 사회대학생회 인권국에서 논의를 시작했고. 그래서 그 시작부터 비서공 집행위원을 해오다가 2020년에 예인에게 집행위원장을 물려받아서 했던, 지금은 민주노총 총연맹 법률원에서 변호사 일을 하고 있는 최인영입니다.

예인 그 처음 출범 당시에 제가 사회학과 과학생회장이었어요. 그래서 과학생회에서 비서공 가맹할 때 파견인으로 들어가서 처음 시작했고. 이듬해 과학생회장 임기 끝날 때쯤, 집장을 제발 좀 해 달라고. (일동 폭소) 사람이 없다고 해가지고. 그래서 2019년에 비서공 집장을 했던, 지금은 민주노총 금속노조 법률원에서 일하는 이예인입니다.

간사 저는 그냥 비서공에서 이것저것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은세 여러 가지를 겸직하고 계시잖아요.

간사 (한숨) 그걸 그렇게 설명해야 하나요?

은세 다양한 일들을 하고 계신다.

간사 비서공 회칙상에 규정된 간부들이 있잖아요? 학생대표하고 회계 정도가 역할이 규정되어 있고, 집행위원장은 이제 폐지가 되었지만. 회칙상에 그렇게 공식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여러 가지 다양한 일들을 다양하게 하고 있습니다. 잡일꾼이에요.

간사 그러면 일휘가 그냥 집장이신 것 아닌가요? 집장 일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은세 비공식 집장. (웃음)

인영 잠깐만, 집장이 왜 없어졌어요?

간사 그런 얘기들을 이제부터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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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고 있고 잘 했다’는 말을 많이 해주는 게 중요”

예인 아까 돈이 없다니, 요새 비서공 예산 현황이 안 좋나요? 가맹비가 잘 안 들어와요?

간사 가맹단위들이 없어졌지요. 두 분 활동하시던 시절에는 총학생회, 각 단과대·과반학생회들, 동아리들 비롯해서 20개 넘는, 가장 많을 때는 30개 단체가 비서공에 가맹되어 있었잖아요. 다 없어요, 이제. 실질적으로 기능하는 가맹단위가 학내 민주노조들 정도? 동아리들도 몇 개 안 남았고, 학생회들은 다 전멸. 그렇게 된 지가 몇 해 되었습니다.

은세 로스쿨 노동법학회, 인권법학회에서 가맹하고 있긴 해요.

간사 하지만 거긴 로스쿨 로드가 워낙 많으니까 실질적으로 큰 도움 주시기 어렵고.

인영 학생회들에서 가맹 취소가 결의된 건가요? 아니면 학생회에 안건을 가져갈 사람이 없어서 재가맹 인준 안건이 안 올라간 건가?

은세 코로나 거치면서 학생회에는 요청을 잘 보내지 않게 되었어요. 효용 문제도 있고, 백래시 등의 우려도 있다는 판단에서 안 보내게 된지 꽤 되었습니다.

예인 그럴 수가. 비서공을 사회대학생회에서 만들었는데. 집장은 왜 없어졌어요?

은세 하실 분이 없어서…….

간사 은세 대표 1년차인 2022년부터 집장이 공석이 되었어요. 원래 대표가 가맹단체들과의 교섭 같은 대외 업무, 집장이 회의 준비와 실무 총괄 같은 내부 업무를 맡도록 되어 있었다지요? 그런데 098가맹단체들이 없어지고[1] 연대체 성격이 약화된 상태에서 집장이 공석이 되니 대표가 집장 일까지 하게 되고. 그 상태로 몇 년 가다 보니 총회에서 회칙 개정할 때 이미 유명무실화된 집장직을 폐지하자고 얘기가 되었습니다.

예인 허억. 대표가 너무 힘드셨겠는데.

은세 그래도 직전 대표였던 재현이 한 학기 공동대표를 해 줬어요. 그런데 2학기부터는 사회복무요원으로 병역을 다녀오셔야 했고.

예인 진짜 힘드셨겠다. 아찔하다 아찔해.

은세 그래서 사실 저는 잘 못했어요. 게다가 저는 그 전에 다른 활동 경험이 없었고. 대표직 후반 시기에는 제가 대표를 하는 게 나 자신에게는 충분히 기여되고 의미가 있지만 비서공이라는 단위에는 기여나 의미가 크지 않은 것 아닌가 그런 생각마저 들어서.

예인 허억. 왜 그런 생각을.

간사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 안 읽고 오신 글에 그 이야기가 구구절절 적혀 있고요.[2]

예인 그게 개인의 역량 부족이나 불성실의 문제가 아니고 조건이 그랬던 거라면, 그런 때는 그 상황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거죠. 심지어 이게 첫 활동이었으면 끌어줄 선배들도 없고 배울 것도 없고 그랬겠다.

인영 22년 3월, 은세가 막 4대 대표로 취임하셨을 때 제가 진영(비서공 초대 집장, 제2대 대표)이랑 둘이 은세에게 밥을 사드렸잖아요. 그때 099너무 마음이 안 좋았어요. 조직재생산이라는 게 되려면 누가 남아서 같이 얘기를 하면서 서서히 떠나가고 서서히 채워져야 하는데. 저나 진영은 이미 떠난 사람 입장에서, 운동 경험이 없는 상태로 새로 대표를 맡게 된 분에게 “열심히 하세요”라고 얘기하기도 죄송스럽고 부채감이 있었어요.

예인 당시에 인영이 나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랬던 게 방금 기억났어요.

간사 그게 누구 한 사람이 열심히 해서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던 것 같고 (일동 “그건 맞아요 맞아”) 2017년 전후에 시작된 지형변화와 시대적인 조건들이 굉장히 크게 작용했잖아요. 가령 저나 은세 같은 경우에 이 사람들을 제가 학부생이었던 2010년대 상반기에 갖다놓으면 우리는 운동권이라고 분류가 안 되었을 사람들이거든요.

예인 그럴 수 있지요.

간사 그때는 비권 학생회도 학생복지 사업과 사회참여 사업을 병행하던 소위 ‘운동적 비권’ 시기였으니까요. 총학이 비권인데 국정원 여론조작 규탄하고, 세월호 대응하고, 박근혜 탄핵 시위 나가고. 물론 그게 운동권이 잡은 단과대학생회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겠지만, 비권 총학이 그런 걸 한다고 해서 이상하지는 않은 분위기? 그래서 오히려 노동의제나 인권의제에 막연한 관심이 있어서 집회 같은 데 나가서 결합하는 것만으로 운동권씩으로 분류될 수는 없던 시절이었다고 기억해요. 그러다 이제 설명하자면 지면이 부족해지는 거대한 지형변화를 거치면서 전통적 운동권과 운동적 비권이 다 없어져서 우리 같은 사람들도 타칭 운동권이 (은세 웃음) 되어 버렸는데.
두 분이 활동하던 2018-2020년 시기의 조건은 그 완전 예전과, 100단과대학생회조차도 운동성이 사라진 지금, 그 사이의 중간적 시기였지 않겠어요. 그 시기의 활동조건이나 비서공의 조직형태는 어떠했나요? 당시에는 연대체 형태였으니까, 가맹단위들이 있고, 거기서 파견된 사람들이 있고, 그 중에서 집행부가 만들어지는 그런 전형적인 구조였을 텐데.

예인 맞아요. 딱 그랬어요. 그때는 집행부도 팀을 여럿 나누었어요. 서울대학교가 고용형태가 엄청 많잖아요. 당시 표현으로 “비정규직 백화점”이라고. 그래서 고용형태별로 팀을 나누어서 시설팀, 기전팀, 생협팀, 비학생조교팀, 언교원팀, 등등. 각자 팀에서 그 분야의 노조원 분들과 얘기를 해서 활동을 했어요. 뭔가 의제화하고 싶을 때도 각 팀에서 고용형태별로 조사해 와서 정리해서 올리고. 팀당 인원은 다섯 명 이상? 집행위원이 그만큼 많아서 집행위원회의에 전원 다 모이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가맹단위들이 모인 전체회의가 또 따로 있었고. 학생회로 비유하면 전학대회 같은 것.

은세 옛날에는 그럼 전체회의를 하면 가맹단위 파견인 분들이 참석을 많이 하셨나요?

인영 그랬던 것 같아요.

예인 그리고 총회도 총학 전학대회 할 것 같은 대형강의실, 25-1동 같은 곳 빌려서 비서공 총회를 그런 데서 하고. 회계결산 보고하는 자리가 총회 맞지요? 차기 대표와 집장을 거기서 호선하고.

인영 출범 이후 1-2년은 그랬을 텐데, 제가 집장 할 때만 해도 그렇게 크게는 못 했어요. 코로나 시작될 시기여서 다 ZOOM으로 하고. 저는 대면으로 회의한 기억이 없어요. 집행부원 수도 좀 줄어서 팀당 두세 명 이상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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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세 제가 대표 재임하던 때는 팀 같은 것 없이 회의 참석 인원이 최소 다섯에서 최대 열 명, 꾸준히 회의 나오는 분이 네다섯 명 정도였고. 포스터링 같이 몸을 써야 하는 실무인력은 한 번에 모일 수 있는 수가 최대 대여섯 명 정도. 가장 힘들었을 때는 둘이서 하다 탈진한 날도 있었고.

간사 우천 상황 때문에 급히 진행해야 하는데 사람 불러모을 시간여유가 없을 때는 혼자 하룻밤 새 70장, 90장 붙이기도 했지요. 그건 뭐 진짜 급박해서 어쩔 수 없는 경우였지만.

예인 지금은 몇 명이 활동해요?

간사 작년 탄핵시국 거치며 많이 들어오셔서 활동회원 수가 스무 명을 넘겼습니다.

예인 만나는 주기는 어떻게 돼요? 회의하는 주기.

은세 2주에 한 번.

인영 저희 때하고 비슷한데?

은세 그런데 한 번에 다 모이기 쉽지 않고, 오는 사람만 오게 되기 쉽다는 문제가 있으니까.

예인 우리 때는 팀별로 나뉘어 있었다고 했잖아요. 회의 참여도가 높은 사람들이 각 팀장들이었고, 팀장이 팀원들에게 집행부 회의 참여를 독려해서 회의를 조직하는 방식이었어요. 그래야 다섯 명 올 회의가 팀별로 한 명씩 더 와서 열 명 오는 회의가 되는 거예요. 집장 혼자서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조직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집행부원들이 단과대가 다 다르다고요? 이것도 신기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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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세 어느 한 단과대의 비중이 압도적이지 않고 다양하게 고루 있어요.

간사 학생회에서 조직적으로 붙는 게 아니고, 동아리처럼 개별 인맥으로 조직화되거나 새맞이 오픈세미나 참여 학생들 대상으로 모집을 하니까 패턴이 없어요. 그리고 의외이실 수 있지만 이과가 또 많아요. 은세가 차기 대표 넘긴 후배도 공대생이고.

예인 너무 신기하네요.

간사 단과대 불문하고 원자들이 학생회의 조직적 경유 없이 인권부문 동아리나 비서공 같은 데로 개별적으로 오는 현상의 결과겠지요. 두 분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사회대는 이런 데 당연히 와서 끼어야 하고 그런 분위기였을 것 아니에요?

인영 분위기라기보다 애초에 비서공이 사회대가 주축이 되어서 출범시킨 조직이었기 때문에. 비서공 자체가 사회대학생회 집행부의 큰 사업이었고, 사회대학생회 인권국과 긴밀한 연결이 있었고. 비서공 초대 대표가 사회대학생회장이었고.

인영이 2020년 이전의 상황을 설명하고 은세가 듣고 있다. 서로 신기해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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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사 사회대와의 그런 조직적 연결은 이제 없는 거죠. 은세가 대표 맡기 시작한 시점에서 이미 그랬어요.

인영 그러면 코로나 시기 지나면서 운동적 토양과 지형이 우리가 기존에 누렸던 것과 완전히 달라진 상황에서 은세는 비서공이라는 노학연대체를 어떻게 운동적이거나 대중적인 것으로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까요? 어떤 노력을 하셨는지 궁금하거든요.

은세 생각해 보면 대중적인 쪽에 가까웠던 것 같기는 해요. 일휘 말처럼 저는 전통적인 운동권 범주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코로나 시기에 입학을 해서 에브리타임을 항상 많이 봤었는데, 그때 에타에서 비서공이 정말 갖은 욕을 먹고 위험한 곳인 것처럼 얘기가 되어서. 그런 생각 때문에 학생들이 참여하지 못하거나 꺼려하는 장벽이 있다면 그걸 없애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다가가기 쉬울 수 있도록 만드는 데 많은 집중을.

예인 그래서 대중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셨나요? 어떠셨어요?

은세 하아……. 저는 충분히 성공했다고 생각을 하지는 않고요. 내부 참여도도 충분히 높이지 못했다고 느꼈어서. 집행부원 수가 적어도 모두 결합도가 높았다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또 그게 잘 안 되니까. 그래서 정기적인 일, 가령 총회 준비하는 것만으로 이미 지치고. 정작 새로운 사업 기획하는 게 너무 힘든 거예요. 사실 사업을 하자고 단위가 있는 건데, 정작 그 사업을 제대로 못 하면 대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인영 아아, 어떡해. 너무 뭔지 알 것 같아요. 그럼 그런 고민을 같이 공유할 분이 있었나요, 비서공 안에서? 저는 진영 대표랑 페어를 이루면서 2020년 한 해 동안 엄청 많이 만났거든요. 매일 카페에 같이 앉아서 얘기하고 얘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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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세 재현 정도? 저보다 더 오래 활동을 한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그런 고민을 저보다 더 짧게 활동한 분들에게 말씀드리기는 쉽지가 않았죠.
그리고 행사 같은 걸 기획을 해도 포스터 붙이거나 웹자보 올려서 공시하듯 홍보하는 걸로는 부족하고, 와달라고 개별적으로 연락을 돌리지 않으면 오시는 분이 참 없고. 그러면 이 행사를 하는 게 어떤 의미인가 그런 생각들도 들고…….

예인 그런 행사들은 우리 때도 있었죠. 준비했는데 그냥 준비한 사람들만 오는.

인영 저는 이게 조직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맞는 것 같아요. 학생회 같은 가맹단위들이 뒷받침이 되어줄 때는 기본적으로 가맹단위 안에서만 홍보를 돌려도 오고 싶어하시는 분들이 오고, 학생회에서도 나름 가야 한다고 독려를 해줘서 다같이 가고 그런 분위기가 있었는데. 사실 그게 되게 중요한 거잖아요. 개인의 노력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예인 활동에 정해져 있는 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은세 때와 우리가 다르고, 인영 때와 제 때가 또 다르고. 제가 했을 때는 가맹단위도 많고 충분히 대중조직화할 수 있는 조건들이었기 때문에 그걸 잘 해내는 게 우리의 역할이었다면, 은세 경우에는 조직망들이 무너진 상태에서 있는 사람들이라도 붙잡고 내실을 쌓아가는 게 활동의 모습이자 주어진 역할이었던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그 역할을 잘 하신 거죠.

인영 주어진 조건 위에서 조직에 대해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하신 것만 봐도,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신 것이다.

간사 왜 카운슬링 자리처럼 됐지? (은세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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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영 왜냐하면 저도 집장으로서 자책과 고뇌를 되게 많이 했거든요. 내가 안 했으면 나 아닌 누가 더 잘했을 텐데?

예인 이게 학단위 간부 할 사람들의 팔자인가 봐. 저도 당연히 그랬어요. 나보다 먼저 한 사람들은 되게 잘한 것 같고. 어떻게 이렇게 하셨지? 이러면서 맨날 그 사람들하고 비교를 하는데, 사실은 그 사람들도 못한 것 되게 많아. (일동 폭소) 아마 그 사람들에게 우리 조건이나 은세 조건이 주어졌으면 비슷하게 했을걸요. 아니면 그보다 더 못했거나?

간사 지금 하고 있는 후배들은 은세 보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은세가 선배들 보듯이.

인영 그게 진짜 맞아요. 표현을 잘 안 할 뿐이지.

예인 인영이 3학년 때 반학생회장 할 무렵 밥약하면서 제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너 잘하고 있다”고. 우리끼리 서로 ‘잘하고 있고 잘 했다’는 말을 많이 해줘야 잘 하는 사람이 힘을 얻어서 더 잘하고 소모되지 않을 수 있어요.

인영 저도 그 고민 계속 하긴 했죠.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너무 다르고.

예인 우리는 대학 오기 전까지 점수로 바로바로 성과가 보이는 그런 삶을 살았지만, 운동이라는 게 성과를 그렇게 가시적으로 양적으로 평가하기 어렵잖아요. 당연히 질적인 평가는 해야 하지만. 그리고 어린 사람들끼리 있으니까 서로 낯간지러운 말 잘 못하고. 그래서 그런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은세 고생하셨습니다.

은세 두 분도 고생 너무 많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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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맞아요.

인영 맞긴 해요.

은세 진짜 고생인 것 같아요.

“사람들이 즐겁게 활동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인영 저는 휴학하고 했어요, 비서공 집장.

예인 어? 나돈데.

은세 저도 한 학기 휴학 했다가 대표를 하게 된 건데.

인영 나도 똑같아요. 저도 딱 이거에요.

은세 아! 휴학을 하면 안 되나 봐요. (웃음)

인영 휴학 하는 틈을 봐가지고 “너 휴학하니까 해보는 게 어때?” 이런 식으로 되는 거죠.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저는 그때 기억으로 한동안, 특히 로스쿨을 버텼던 것 같아요.

예인 로스쿨보다는 뭐든지 다 재미있어요. 그런데 난 너무 오래 되어서 잘 기억이 안 나요. 인영은 제일 기억에 남았던 활동이 뭐예요?

인영 아무래도 윗공대 청소노동자 사망사건 1주기 추모사업 때 열심히 했던 것이 기억에 남고. 그때 검은 추모 리본을 학내 여기저기 난간에 묶고 다니는데, 경비노동자 분이 나와서 여기에 이런 거 하시면 안 된다고. 그래서 우리끼리 노동자가 노동운동을 통제하는……

예인 롯데백화점처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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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영 ……이 현상에 대해서 토론을 했고. 그런 토론을 많이 했던 게 기억에 많이 남는 것 같아요. 사실 학생이 노동자가 아니잖아요. 노동을 하는 학생들도 있긴 하지만. 노학연대를 할 때 노동자와 학생이 같은 공동체 구성원이고 그래서 구성원으로서 연대해야 한다는 당위는 알겠지만, 구체성을 항상 찾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우리가 어떤 접점이 있고 왜 같이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가시화하기 위해 노력한 게 저와 진영 대표 체제에서의 비서공 내부조직화 활동이었던 것 같아요. 집행부 회의 할 때마다 발제 꼭지를 한 명씩 돌아가면서 신문읽기를 한다던지.

은세 집행위 회의를 할 때마다 처음에 기사읽기 하는 게 그때부터 시작되었군요.

간사 인영이 2020년에 행정관 앞 1주기 추모 집회 사회를 보셨지요?

2020년 8월 10일 공대 청소노동자 사망사건 1주기 추모 집회에서 사회 보는 인영. 이듬해 대표직을 물려받는 재현이 뒤에서 현수막 든 모습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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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영 오오, 맞아요. 어떻게 아세요? 소름.

간사 저는 그때 아직 집행부원은 아니었는데 집회 현장 멀찍이서 봤어요.

인영 19년에도 기억나는 거 있어요. 노동절 전날 행정관 앞에 크게 앉아서, 전철연(전국철거민연합회)에서 오신 장터도 있고 그랬나? 그걸 노조원들과 나눠먹고서 노동절 전야제를 갔어요. 그런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게 저는 좋았던 것 같아요.

예인 여의도에서 전야제를 해서 거기 제가 비서공 대표로 갔었어요. 발언도 했고. 너무 옛날이라 발언문은 안 남아 있어요. 언어교육원 투쟁 마무리되고 나서 종강총회 뒤풀이에서 한국어교원 선생님들과 회식한 기억도 나고.

2019년 4월 30일 노동절 전야제에서 비서공 대표로 발언하는 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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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비서공 총회 뒤풀이 자리. 언어교육원 한국어교원인 대학노조 서울대지부 이창용, 김미연 노조원이 함께했다.

예인 그리고 기전 파업 때. 이때 백래시가 장난 아니었죠. 이때는 일주일 내내 매일 학교에 있었던 것 같아요. 자보도 빨리빨리 계속 쓰고. 온라인 여론도 살피며 바로바로 급박하게 대응해야 해서 매일 밤까지 회의하고.

인영 제 기억에는 그때는 학생회에서도……

예인 많이 붙었죠.

인영 아니야, 학생회에서도 백래시가 있었어요.

예인 에, 그랬나?

간사 공부해야 하는데 중앙도서관 난방을 끄냐고 총학이 노조에 항의했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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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아, 맞아. 기억나요.

간사 그래서 사회적으로 욕을 엄청 먹으니까 대응하기 위해 비서공하고 학생회들이 함께 ‘서울대학교 시설관리직 문제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띄었잖아요. 그 공대위를 통해서 총학 비롯 학생회들이 붙었지요.

예인 그런데 그 공대위 재미있었어요. 파업하는 데 연대방문을 공대위 사람들뿐 아니라 그냥 학생들이 많이 오는 거예요.

은세 우와아.

예인 기자들도 많이 오셔서 저희 발언 따가던 생각이 나네요. 비서공 아닌 사람들도 많이 왔어요. 가맹단위들이 많아서 조직할 수 있는 뿌리들과 가지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2019년 기전파업 당시 서른 명 가까운 학생들의 방문을 받은 노조 농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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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영 19년이 확실히 직접행동이 굵직굵직한 게 많았어요. 기전파업, 언교원, 생협파업…….

예인 그런데 그러려면 노조가 뭔가 움직임이 있어야 거기 학생들이 결합할 수 있는 건데.

간사 확실히 그런 게, 생협 파업이 19년에도 21년에도 있었잖아요? 그런데 21년에는 코로나 통에 밖에 나오기 힘든 데다, 가맹단위들 줄어들고 비서공 집행부의 조직력은 이완된 상태에서 파업에 붙을 수 있는 정도에 한계가 있었고.
지금은 반대로 22년부터 5년째 쟁의가 없거든요. 그래서 은세가 대표 맡던 무렵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집행부원들이 학내 쟁의에 조직적으로 붙은 경험이 없어요. 22년 서울대병원 파업에 연대방문하고 은세가 발언도 한 적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병원은 관악캠퍼스 교정에 비해 비서공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죠.

은세 22년에서 24년 사이 계셨던 집행부원들 중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던 분들이 대개 21학번 이전이셨어요.

간사 세대를 따지자면 우리는 2019년과 2021년의 사건들, 생협 파업이나 청소노동자 산재사망사건 같은 사안들에 대한 기억, 부채감 이런 게 활동 동력이 되었던 사람들인데. 22학번 밑으로는 그런 기억들이 없으시고.
그러다 보니 투쟁에 결합한다는 게, 학교 밖 투쟁현장에 연대하러 가는 것도 물론 좋은 일이고, 당연히 갈 때마다 그 현장이 서울대 현장과 어떻게 결부되는지를 고민하고 설명해서 가려고 노력해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정 안의 노학연대체로서 지향점과 재생산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결국 교정에서의 경험이 필요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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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세 그런 조건에서, 서울대 내부에서 후배 회원들이 학내 노동의제를 좀더 피부에 닿게 느끼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고. 또 노동자 선생님들과의 관계가 쟁의가 있어서 결합을 하던 2019년만큼 끈끈하게 가까워지기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뵐 일이 학기에 한 번 현안 면담 듣는 자리밖에 없고. 사무적인 자리처럼 되어 버릴까 봐 걱정되고 죄송스럽고. 그리고 사안이라는 게 사실 있어서 좋은 게 아니잖아요.

예인 아아. 쉽지 않네요, 그거.

은세 그래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방법을 계속 잘 몰랐어요. 학내 사안이 없는 상황에서 집행부 재생산을 위한 자구책을 마련하기에도 학생사회 분위기나 상황이 쉽지 않았고. 학생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계속 제공하려고 시도는 했는데.

간사 토론회, 강연회, 상영회, 전시회, 간담회, 집담회, 청소노동자들과 체육사업, 요 최근에는 2025년 2월에 전수조사를 해서 교정 안의 생협노동자 휴게실 전체와 청소노동자 휴게실 절반 정도 조사를 했잖아요? 그게 은세의 집행부원으로서 마지막 참여 사업이셨잖아요. 그 조사 결과 가지고 단과대별 분석해서 발표회도 하고 등등…….

예인 많이 하셨는데요?

인영 할 수 있는 걸 다 하셨는데요?

간사 할 수 있는 걸 다 했는데 집행부원의 결합도를 어느 수준 이상으로 많이 높이는 건 기대만큼 잘 안 되어서 힘들었던 것이겠지요.

인영 그건 상황적인 것도 있겠지만 운동에 내재된 문제도 있는 것 같아요. 제 때도 결국 할 사람만 한다는 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113남았거든요. 기획과 집행을 같이 고민하고 사업을 꾸리는 중핵과, 꾸린 사업에 참여만 하는 외연이 분리되는 현상이 있었고. 사실 재생산이라는 것도 그 외연에 있는 분들이 중핵으로 들어오면서 세대교체와 함께 재생산이 되는 건데, 그게 쉽지 않은 문제라는 생각은 저도 했어요.

예인 상황이 다른 점도 있어요. 옛날에는 비서공 사람들이 비서공만 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조직이 있었어요. 여기서 조직이라는 건 2010년대까지의 전통적인 정파 운동권 조직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라, 학내의 기반조직을 말하는 거예요. 당장 우리 둘도 정파가 없었고.

인영 당시에 저희 안에서도 학생회를 한다는 것, 운동권이라는 것에 대한 상과 정체성이 개개인별로 다 달랐고, 단지 운동에 대한 가치관을 공유하고 활동할 열의가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 정도로 나뉘었어요. 예컨대 인권운동에 관심 있는 사람도 있고, 마르크스주의 연구가 관심사인 사람도 있고, 각자 결이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조직이 있었기에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예인 그런 기반조직들에 원래 뿌리내려 있던, 각 분야에서 교차성과 구조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모인 연대체로서 비서공이 만들어졌던 것이고. 그 중에 열의가 더 있는 사람들이 비서공 중핵으로 오고 그랬어요.
두 분은 원자였던 분들이 비서공부터 와서 시작을 한 거니까 완전 다른 것 같아요. 지금은 학내 조직망이 다 말랐다니 여기서(비서공에서) 시작해서 퍼뜨려 나가야 하는 상황인 거죠.

간사 그리 분석한다면 출범 당시와 비교해서 조직의 구도와 역할이 정반대가 된 셈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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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세 저만 해도 20학번이라, 2019년에 조끼 입은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행정관 앞마당을 가득 메운 광경 같은 걸 자료영상으로만 봤지, 교정에서의 대규모 집회를 직접 본 적이 없어요. 21년 생협 파업도 코로나 때였고. 그러니 교정이 대규모 집회의 현장이 될 수 있다는 상상 자체가 너무 어려운 거예요.

예인 저희 때만 해도 본부 앞 집회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어요. 아침마다 출근 선전전 하고, 무슨 일 있으면 필로티 앞에 천막이 서고.

간사 그 천막 세우던 자리 분수 되었어요. 이제 거기 천막 못 세웁니다.

인영 본부와 총장잔디가 저희에게는 중요한 거점이었는데. 광화문광장 없앤 것처럼 환경적 물리적 토대도 없애는 거죠.

2019년 생협 전면파업 당시 필로티 앞에 설치된 천막. 왼쪽 구석으로 ‘총장잔디’가 보인다.
이 자리는 이제 분수가 조성되었고 “안전을 위해 출입을 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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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사 총장잔디가 총장잔디라는 웃기는 이름이기 때문에 생기는 저항적 의미가 있었잖아요.[4]

인영 있었죠.

간사 그런데 그 잔디가 학생들에게 선심쓰듯 개방이 되고, 이름을 새로 붙이고 하면서 의미가 다 탈색되고, 역사가 없어지고. 이제 총장잔디라 그러면 못 알아들어요.

은세 그쵸. 이제는 그냥 (의미 없는) 잔디광장이고. 교정에 전해지는 비공식적 지명들도 이제 전승이 안 되고. 해방터가 어디인지도 몰라요. 아크로(아크로폴리스) 정도만 남아 있고.

간사 그 잔디 이름 공모전은 왜 했나 몰라요. 개 이름을 강아지라고 붙인 격 아니야.

인영 그렇다면 궁금한 게, 운동문화라는 게 변형되고 새로 만들어지기도 하는 거잖아요. 저희가 학생일 때 계승받았던 전통적인 학생문화가 다 탈색되고 없어져 버렸다면 학내에 새로운 운동적인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셨을 것 같은데.

은세 저는 비서공 내부 참여도도 많이 낮아진 상태니까 그걸 다시 높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외연에서 중핵으로 오는 고비가 높다는 그 문제가 설령 항상 있던 문제였다 해도, 제가 그걸 그리 성공적으로 극복은 잘 못했던 것 같고. 이게 운동단위만의 문제는 아닌듯한 게, 코로나 거치면서 학생회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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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사 요즘은 학생복지만 하는 비권 학생회도 재생산이 어려워요.

은세 상영회 같은 방식의 행사를 계속 시도한 것도 그런 취지에서였던 것 같아요.

간사 집행부 재생산 자구책에 그쳐선 안 되고 이걸 대중사업으로도 만들어야 하니까.

은세 그렇죠. 상영회 같은 건 취미동아리 같은 데서도 하니까. 그런 말랑하다면 말랑한 느낌으로 행사 기획을 많이 했었고. 그래도 참여하신 회원들의 후기는 좋지 않았나요?

간사 왜 나한테 그걸 동의를 구하려고 해요? (웃음) 창간호에 실린 표현대로 “사람들이 즐겁게 활동할 수 있게 하고 싶다” 라는 게 은세 본인의 기조라면 기조였던 거겠죠.

은세 왜 그런 기조를 생각했냐면, 지쳐서 떠나는 사람들을 많이 봐서. 비서공만의 얘기는 아니고, 다른 단위들과의 네트워킹 시도들이 잘 안 되었던 것에 그런 이유도 있었죠. 여하튼 재생산을 위해 이런저런 고민을 많이 했는데, 가령 다른 학교 행사, 어디였지?

간사 덕성여대 여성파업? 서강대 의기제?

은세 의기제였던 것 같아요. 그때 구체적인 사업을 바로 해나가기 어렵다면 학생들을 일단 모으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얘기로 끝이 났는데. 막상 구체적 사업이 없으면 학생들의 모임이 유지되기 어렵다는 딜레마는 여전히 있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계속 있었죠.
그래서 비서공 사업에 참여한 집행부원들 의견을 나중에 들어보면 다 의미있었다고 하셨는데, 충분히 많은 분들이 중핵으로 올 만큼의 동력을 주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2년 내내. 그래서 제가 117스스로 잘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는 것이고. 제 재임 기간 동안은 어떻게든 끌어모아서 하면 되는데, 제 후임에게 인수인계를 하면서 계속 그렇게 해달라고 말하기도 미안하고 그렇고. 끝까지 저는 답을 찾지는 못했고.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것 같아요.

“다시 돌아가도 비서공 할 것 같아요”

예인 그럼 왜 하셨어요? 우리는 재생산을 당했잖아. 우리 왜 당했을까? (일동 웃음)

인영 우리 때는 처음 입학했을 때부터 학생회 조직이라는 곳의 생리와 효용과 중요성을 알게 되니까. 이미 잘 있는 조직이 없어지는 게 너무 무서웠던 거지, 우리는. 그리고 그때는 투쟁 현안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는 그걸 해야 했고. 그리고 이게 생각보다 치밀한 과정을 통해서 진행이 되잖아요. 새내기 때 말랑한 사업으로 시작을 하면, 같이 고민을 나눠가며 서서히 스며들다가, 3학년 되어서 간부직 떠맡게 되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건데.

예인 이게 또 저랑 다르네요. 저는 그냥 다 알아서 잘 넘겨졌어요.

간사 지금 옆에 앉은 사람(인영)한테?

예인 그랬죠. 학생회도 비서공도, 의도적인 뒷작업 같은 걸 하지 않고도 알아서 이어받고 싶다는 후배들이 있었어요. 운인 건지 뭔지 모르겠는데. (웃음)

인영 아니야 그게. 뒷작업이라는 게 꼭 으슥하게 “네가 해야 하지 않겠어?” (예인 폭소) 이런 것만 작업이 아니고. 넓은 의미에서. 어떻게 하는지를 보여주고 너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고 그런 118것들이 활동을 함께 하는 은연중에 생기는 거죠. 그리고 솔직히 마음 속으로 내정하고 있었잖아요? 그러지 않으셨어요? 대표 양진영이 하고, 집장 최인영이 하고.

예인 음, 하면 좋겠다. 음, 하겠네. (일동 웃음) 저는 확신이 있었어요. 할 것 같은 애들이 있었어. 그게 운이지 않을까? 진영도 과 후배였고. 그래서 학생회장은 이 친구가, 비서공 집장은 이 친구가 하겠군. (웃음) 이런 게 있었어서 운인가 싶기도. 흐음, 생각해 보니 아니에요. 제가 잘 보여주고 잘 심어줬나 봐요. (일동 폭소)

같은 세대를 공유했다 하더라도, 자리를 물려받은 사람과 물려준 사람의 기억 또한 미묘하게 다르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인영 그래서 저는 은세 비슷하게 두 가지 마음이 있었던 거죠. 코로나라는 좋은 상황적 핑계도 있으니, 환경 탓을 하고 나는 최선을 다했다는 좋은 평가를 내리고 싶은 마음이 있고. 다른 한켠에는 내가 그래도 예인처럼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두 가지 마음들이 항상 같이 있었고.
119저랑 같은 시기에 비서공 집행부 했던 친구들이 저한테 와서 공동체가 어떤 식으로 되어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 토론해야 하고 운동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지 배웠다고 말해줄 때, 저는 그 마음이 너무 고마우면서도 죄책감이 있고. 복합적인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비서공을 하고 비서공을 떠나면서.

은세 사회대나 다른 학단위들과 연결이 끊어진 것도 어려움 중 하나였던 것 같기도 해요. 원인 이런걸 다 떠나서, 다른 운동단위들과의 연결이 없다는 게 생각보다 꽤……. 왜냐면 제가 보고 참고하고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생각보다 중요하다는 걸 나중에 느껴서.

간사 23년에 학소위가 재건이 되면서 그런 네트워킹은 어느정도 복구되지 않았나요?

인영 학소위가 무너졌어요? 저 학소위도 했었거든요.

간사 여러분 앞에 이분이 재건학소위 2대 운영위원장이십니다.

인영 (경악) 학소위장도 하셨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예인 그러니까 이게 똑같다니까요. (테이블 두드림) 학소위가 15년에 처음 만들어졌는데, 16년에 백래시로 한번 날아갔다가 재건하는 학소위(준) 이런 걸 그때 제가 했었어요.

은세 해산 이유는 코로나 때문에……. 그리고 2023년에 재건되면서 학소위 운영위와 집행위를 분리하는 형태가 되었어요. 집행위원은 대중모집을 하고, 운영위원은 비서공 등 가맹단체 파견인들이 맡으면서 그 중에 운위장을 세우는 식으로.

간사 두 분 활동하시던 때에는 반대로 학소위가 비서공 단체회원으로 가맹하고 파견인을 보냈잖아요? 아까 말씀하신 대로 과거에는 비서공이 오히려 학내의 여러 조직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서 만120나는 장소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단면일 테고. 이제는 반대로 비서공에서 학소위에 파견을 보내서 네트워킹을 하는 거지요.
2024학년도에 비서공 파견 운영위원이자 전임 대표인 은세가 학소위 운위장이었던 덕분에 비서공과 학소위 및 다른 학소위 가맹단위들 간의 소통이 아주 원활했어요. 특히 윤석열 탄핵 국면에서 비서공·학소위·달 3개 단위는 거의 한몸으로 움직이면서 탄핵 집회를 개근했고. 그래서 은세는 2025년 2월 말에 학부 졸업하는 바로 그날까지 정신없이 바쁘셨는데. (웃음)
그런데 학소위도 그 탄핵 이전에는 집행위원 대중모집이 그렇게 잘 되지는 않아서 운위장이 고생이 많은 체제였다고 들었는데, 이것도 하자면 긴 이야기입니다…….

예인 아무튼, 다른 단위들과의 만남이 중요한 게 맞기는 맞아요. 저도 마냥 잘 되던 조직에 바로 떨어진 사람은 아니거든요. 16학번으로 입학했을 때 과학생회가 죽어 있는 상태였어요. 그때 막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하고 그럴 때였는데. 1학년인 날 어디 데려가 줄 선배가 아무도 없었어요. 대학 오면 주체적으로 살 줄 알았는데 고등학교 때와 다를 것 없이 강의실과 집만 오가며 살 것 같아서 너무 무서운 거예요.
그래서 농활이라도 가보자고 갔다가 사회대학생회 사람들을 만났고. 1년간 단과대학생회 집행부를 하면서 그분들이 하는 걸 배웠어. 이렇게 해야 사람이 모이고 이렇게 해야 열의 있는 새내기를 불러주는 곳이 생기는구나. 그런 걸 배우고 나서 과로 돌아가서 과학생회장을 하며 단대학생회에서 배운 것들을 많이 적용했어요. 그래서 저희 과는 되게 잘 돌아가는 학생회 중 하나였어요.

간사 내가 그렇게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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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손사래) 그건 절대 아니고. 진영 비롯해서 귀한 분들 많았으니까 나 혼자 잘했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보고 배운 게 있어야지 상상력이 커지니까 돌아가서 그걸 도입할 수 있는 건 맞아요. 내게 주어진 자리 위치가 너무 불만족스러우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시야를 넓히는 것도 중요해요. 그러고 돌아가서 바꿀 수 있으면 더 좋고.

인영 이 얘기는 나도 처음 듣는다.

예인 아 그래?

인영 왜냐하면 제가 이듬해 사회복지 17학번으로 입학했을 때 이 분(예인)은 이미 완성형이었고. 저는 과 동기 중에 그런 사람 없어서 사회학과 17들 부러워하면서. 쟤네들은 들어오자마자 투쟁적으로 하는데 나는 왜 못해.

예인 저는 다행히도 1학년 때 다른 과반학생회들도 다 잘 안 되고 있었어서.

간사 다행?

예인 그래서 적어도 남들하고 비교하는 것 때문에 우울하지는 않았어요. 다른 이유로 우울했던 거지.

인영 은세하고 같은 시기에 활동했으면 진짜 재미있게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인 어떤 평행세계에서는 모든 선배들의 예쁨을 받는 차기 대표 이런 거였을 텐데, 그치?

인영 근데 엄청 갈려나가서 지쳐서 또 막 욕하면서 활동하고 그랬을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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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그러면 우리가 뒤에서 달래주는 거지. 저희 둘이 그렇게 달래주는 역할이었어요.

은세 이런 선배분들이 계셨으면 너무 좋았을 것 같아요 진짜.

예인 근데 저희도 이제 머리가 커서 여유롭게 말하는 거지, 같은 수준이었으면 저희도 마음이 힘들고 여유가 없고 그랬을 거예요.

간사 은세도 이제 퇴임을 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좀 내려놓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니에요?

은세 그렇죠. 얼마 전에 그 당시에 쓴 일기 같은 걸 정리했는데, 저는 제가 당시에는 힘듦을 좀 극복하고 상태가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들춰보니까 전혀 아니었던 거예요. 『물까치』 지난 여름호에 실은 회고록은 상당히 정제해서 쓴 거고.

예인 그래도 좋았잖아요?

은세 진짜 다시 돌아가도 비서공 할 것 같아요. 다시 돌아가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고.

인영 저도 그 생각 엄청 많이 했어요. 요즘은 그렇게 많이 하지는 않는데.

예인 저는 다시 돌아가도 비서공 할 거지만 더 잘 할 것 같지는 않아요. (일동 폭소) 그게 그때의 나의 최선이었어. 그때의 나는 어쩔 수 없었어.

인영 하긴 지금의 머리 큰 상태로 돌아가는 게 아니니까. 돌아가 봤자 똑같이 하겠지. 우리는 각자의 주어진 환경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했고. 그리고 돌아가면 더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의식 과잉으로 넘어갈 위험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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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시 돌아가도 비서공 할 거지만 더 잘 할 것 같지는 않아요. 그게 그때의 나의 최선이었어. 그때의 나는 어쩔 수 없었어.”

은세 아 맞아요 그건 정말!

예인 제가 1학년 때 사회대 집행부 인권사회팀장 맡기로 하고 임기 시작까지 두 달 정도 남아 있었거든요. 그 두 달 동안 마음이 너무 힘든 거예요. 내가 이걸 어떻게 해, 내 그릇이 아니야. 학생회장 언니한테 못하겠다고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엄청 많이 했는데. 그걸 그때 극복을 많이 하……지는 못했지만! 어느 순간 느낀 게 이제는 내가 혼자서 모든 걸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걸 느꼈어요.
저는 한 사람 몫을 할 뿐이고, 주변의 동료들이 몫을 더해주고, 대중과 시민과 많은 학생들과 다같이 뭔가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이지. 나 혼자서 이걸 다 끌고 나가려고 내가 주체적으로 뭘 하려고 하면 어떻게 되……기는 하지만! (일동 폭소) 아무튼 세상 일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책과 부담이 생기는 건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동료들과 연대자들과 사람들을 충분히 믿고 의지하고 나눠서 해야지 일이 잘 될 수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부터 뭔가 개안이 된 느낌이 있었거든요.
124그러니까, 자의식과잉을 내려놔야 하는 것 같아. 다시 돌아가도 난 부족한 점이 있을 거고, 부족한 점을 동료들이 채워줄 거고, 채워진 결과가 그거라면 받아들여야지 뭐.

은세 어차피 과거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인영 예인 말대로 나 혼자서 하는 게 아니고, 같이 고민하고 같이 얘기하고 하는 그 자체가 하나의 운동이고. 저는 비서공에서 그걸 경험하고 이해한 상태에서 법률원 온 게 굉장히 중요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은세도 이미 조직을 경험해 보신 것만으로도 앞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으실 거고, 그 경험으로 또 다른 사람들과 비서공에서의 경험을 확장하는 경험도 하실 수 있을 것이고. 그런 기회들을 많이 마주하셨으면.

예인 저도 잘 못하긴 했는데, 은세의 그 기조처럼 즐겁게 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간사 즐겁게 하셨나요?

인영 근데 비서공 할 때는 진짜 즐겁지 않았어?

예인 …….

선배님들의 만담에 웃겨 죽는 은세. 웃다가 숨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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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영 ……아, 아닌가? 죄송해요. 기억이 너무 미화된……. (은세 폭소) 그런데 확실히 힘들었던 기억도 있어요. 그런데 그 기억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지금 돌이켜 보면 즐겁게 했던 것 같아요.

예인 솔직히 즐겁게 하기 어려운데, 즐겁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인영 은세 요즘은 어떠세요? 로스쿨 안 힘드세요?

은세 힘들어요. (웃음) 근데 좀 다르게 힘든 것 같아요.

간사 과거 얘기 많이 했으니 현재 얘기는 한 5분 쉬었다가 할까요? (일동 “그럽시다”)

“로스쿨 오니까 내가 이상한 사람이고, 나 같은 생각 하고 온 사람 아무도 없어”

인영 그런데 로스쿨 얘기 같은 걸 굳이 길게 해야 하나요? 빨리 끝내버리죠.

간사 로스쿨 뿐 아니라 노동변호사로서의 진로나 전망 같은 것도 얘기할 수 있고.

예인 별로 긍정적인 얘기 할 게 없을 것 같아. 무슨 얘기를 하지요? 죄다 로스쿨 가는 현상? 비판하기 어려워요. 제가 뭐라고 비판하죠? 나는 로스쿨 가서 변호사 되었는데?

은세 두 분은 로스쿨을 왜 가게 되셨는지 여쭤봐도 되나요?

인영 이것부터 어렵네. 저는 좀 계획형 인간이었어요. 인생에 플랜이 있어야 하는 스타일이라 비서공 하는 내내 진로 고민을 했죠. 처음에는 운동권 상근활동이나 비정규노동센터 같은 제도권 안의 126준-활동 같은 곳들 기웃거려 봤는데, 하아. 그냥 너무 힘들어 보였어요. 제1이유. 너무 힘들어 보이고 지속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어느 정도 안정적인 뭔가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생각해 본 게 대학원을 가 볼까?

간사 대학원이 안정적?

인영 지위적 안정을 말하는 거죠. 신념을 지키면서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걸 한다면 연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현장에 있어야 할 것 같은 거예요. 연구의 목적은 어쨌든 학술적 성과를 내는 거고, 그 학술 대상이 되는 사람들 곁에 있는 건 아닐 수 있잖아요. 그러면 뭐하지? 로스쿨 가야겠다. 난 정말 많은 고민을 했어요. 로스쿨은 정말 최후의 최후로 생각하고 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을 먼저 모색했어요. 왜냐면 당사자성 발언이지만, 로스쿨 너무 재수없고 짜증나잖아요.

예인 저는 이렇게 체계적으로 고민하지는 않았고. (폭소) 그냥 고등학교 때부터 인권변호사 하고 싶었어요. 근데 대학 와서 잠시 진로 고민 내려놓고 운동권 하며 살고 싶은 대로 살았는데. 계속 활동하는 삶을 살고는 싶은데 내가 잘하는 걸 도구로써 기여하고 싶다고 생각해보니, 원래 잘하는 게 공부밖에 없으니까 그냥 변호사 하자. 그렇게 대충 정해진 것 같아요.

인영 저도 10대 때 변호사 되고 싶긴 했어요. 단순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변호사 멋있고, 심지어 인권변호사 되면 좋은 일도 하면서. 그런데 오히려 학생운동을 해 보니 현장이라는 게 실제로는 이렇고, 수많은 층위가 있고, 그런 걸 느껴 보니 이게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3학년을 마지노선으로 두고 그때까지는 결정해야겠다.

127

예인 진짜 계획형이다. 나도 계획형이지만 더해요.

은세 3학년까지 결정하신 거라면 고민을 엄청 일찍부터 하신 거잖아요. 저는 계획형이라고 말도 못 할 것 같아요.

인영 피곤해요, 이렇게 살면.

예인 몰라, 나는. 인영에 비하면 고민한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제가 고민을 했다면 잘하는 걸 하고 싶으니까 내가 잘하는 게 무엇인지 찾는 게 고민이었고. 그런데 학생운동 끝날 때쯤에는 자존감이 안 좋았어요. 내가 잘하는 게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은세 저도 진짜 그렇게 생각했어요.

인영 엥? 왜? 아니 왜 그렇게 생각했어?

예인 사람마다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것이 다르잖아요. 어떤 사람은 공부 말고 다른 것에 특화되었을 수도 있어. 나는 조직화하는 일을 더 잘하는 것 같다, 기획하는 걸 더 잘하는 것 같다, 홍보나 선전을 더 잘하는 것 같다, 그럼 그쪽으로 가면 되는 거니까. 근데 저는 그런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고.

인영 객관화가 안 되어 있으셨네. 엄청 잘 하잖아.

예인 그래?

인영 그때는 진짜 잘했지. 지금은 모르겠는데. (일동 폭소)

은세 근데 저 예인 말씀하신 것하고 거의 똑같아요. 운동과 관련된 뭘 하면서 살고 싶기는 한데, 해본 결과 제가 기획이나 조직 운영에 그렇게 능력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고.

간사 (어이없음) 뭐라고요? 뭐라고?

128
은세와 예인은 자신이 조직 일을 잘 못해서 공부로 기여하자고 로스쿨에 갔다지만, 이 둘이 각각 얼마나 유능했는지 바로 곁에서 본 사람들은 어이없을 따름이다.

은세 그렇다면 뭘 할 수 있을까? 제가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운동과 연결된 걸 할 수 있을까? 플러스 약간의 시간유예도 원했던 것 같고. 말씀하신 내용과 거의 똑같은 사고과정을 거쳐서 너무 신기했어요.

예인 이런 성격의 소유자들이 있나 봐.

인영 비서공의 쏘울이 있네.

은세 아무튼 좀 잘할 수 있는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1년 다녀 보니 이게 잘할 수 있는 일인지 의문이 있긴 하지만.

예인 비서공 같은 활동 해본 게 변호사 되면 다 쓸 일이 생겨요. 어디 가시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은세 어디를 가느냐……. 그것도 고민인 게, 로스쿨 오니까 주위에서 다들 너무 빠르게 진로를 정하고, 요새는 로펌 채용은 1학년 여름방학 때 시작된다 그러니까, 다들 목표를 향해서 열심히 달리는 거예요.

129

인영 나는 로스쿨에서 가장 힘들었던 게 외로움인데. 학부생 시절 내내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고민을 공유하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옆에 있었는데, 로스쿨 오니까 내가 이상한 사람이고, 나 같은 생각 하고 온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다들 머릿속에 검클빅(검사, 법원 재판연구원[로클럭law clerk], 대형로펌[빅펌]) 생각밖에 없고.

은세 맞아요, 진짜 맞아요. 주위의 모두가 검클빅을, 특히 빅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면 나는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이냐는 불안감이 들고.

간사 이렇게 산다는 게 어떻게 산다는 거예요? 공부를 안 한다는 뜻은 아닐 거 아니야.

인영 그러니까 검클빅 중에 하나로 진로가 픽스가 안 된 상황이? 그맘 알아요. 저는 제가 나름 운동적인 가치관으로 뿌리칠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그 안에 들어가면 피어 프레셔가……. (은세 웃음) 그 마음 너무 이해합니다.

예인 아아아. 그거. 근데 이거는 진짜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저언혀 상관 없어요.

은세 그렇다고 거기 막 가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인영 맞아! 맞아! 맞아요!

은세 근데 그냥 불안한 거예요, 막연하게. 그래서 해결이 될 수도 없어요. 내가 가고 싶은 거면 가면 해결이 되는 건데 그것도 아니고.

간사 근데 어차피 내가 갈 길 아니라 생각하면, 그게 그렇게 불안해요?

인영 이게 엘리트 정체성에서 오는 불안감도 있어요. 인정욕구에 조건화되어서. 제 상담 선생님이 얘기해 주신 건데, 로스쿨 갈 애들은 어릴 때부터 고도의 조건화 속에서……

예인 우리가 괜히 운동권 하고도 로스쿨 오는 게 아니야. (은세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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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영 ……노력과 보상, 더 많은 노력과 더 많은 보상 속에서 살아왔다 보니, 로스쿨이라는 게 그 끝판왕이잖아요. 그래서 여기 있으면 자기 임계점을 넘어서 노력을 해도 결과가 안 나올 때, 그걸 감당하기 힘든 그런 상황이 발생을 해요.
저는 그 불안감을 실무수습으로 많이 해결했던 것 같아요. 변호사가 되어도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다는 걸 시뮬레이션하면서. 1학년 여름, 1학년 겨울, 2학년 여름 다 실무수습 갔거든요? 은세도 실무수습에서 위안을 얻으실 수도 있어요.

은세 너무 공감이 되는 게, 인정욕구의 문제도 있는 것 같아요. 채용이라는 게 진로의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성과를 인정받는 거잖아요. (예인·인영 “맞아 맞아”) 다들 인정의 기준이 그뿐인 가운데 그 길에서 벗어난다는 게 불안해지는 거 같아요. 아까 말씀하신 외로움 가운데 나를 드러내기도 조심스러워지고 힘들고.

예인 비서공 대표 같은 거 하신 것부터가 이미 그 길에서 벗어나신 거라서 괜찮아요. 당신은 이미 글렀어. (은세 폭소) 그런 걱정 마시고 실무수습을 오세요.

은세 여름에 꼭.

인영 저도 마찬가지였지만 불안감 느낀다 해서 그들과 같이 달릴 생각은 또 없으시잖아요.

은세 맞아요!

인영 그러니까 유의미한 불안감이 아니에요, 사실. 그리고 로스쿨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디폴트값이 불안이라서 서로 얘기하다 보면 불안이 상호공명해서 증폭되거든요? 그래서 3학년 때는 사람을 안 만나려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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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어차피 끝날 거예요. 이 시간이 지나면 로스쿨 3년은 인상만 남고, 학부생 때 운동권 하던 나와 법률원에서 민주노총 하고 있는 나만 연결되어서 그 중간은 기억상실 수준으로 없어져 있어요. 인생 길게 살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수십 년 남은 인생 중에 3년 진짜 별 것도 아니라서. 까짓거 3년 이렇게 살 수도 있지, 그런 마음가짐으로 사시는 것도……. (웃음) 고생이 많으십니다.

은세 아닙니다.

인영 끝나고 나서를 상상하세요. 변호사 되면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은세 (한참 고민) ……그걸 근래에는 진짜 생각해보지 못한 것 같아서.

예인 잘하셨네요. 잘하고 있으세요.

간사 엥?

인영 아무 생각 없으신 게 제일 좋아요. 그리고 고민을 하라고 실무수습이 있는 거잖아.

예인 인영은 변호사 되면 어떤 삶을 살고 싶었어?

인영 저는 그 마음은 확고하게 있었어요. 공익인권 변호사가 될 거면 절대 사이드잡으로 하지 않겠다. 무조건 전업이다. 그러면 어떤 전업이 될 것이냐. 서울대 공익법률센터 펠로우 변호사도 생각을 해봤고.

은세 아아.

간사 자체직원이 되려 하셨구나.

인영 (폭소) 그리고 두루 같은 공익법무법인도 생각을 했었고. 민주노총 법률원도 그 선택지 중 하나였고. 제 고민의 결은 그런 것이었죠. 그래서 로펌 실무수습 안 해본 것에 대해 후회가 있지는 않아요.

132

예인 저는 기억이 안 나.

인영 예인은 로스쿨 갈 때부터 민주노총 갈 생각으로 가셨잖아요. 그러니 고민 없으셨겠지.

예인 아! 그렇구나! 저는 별 고민이 없었습니다. (은세 폭소)

간사 (은세 보고) 이 선배 좀 본받으세요.

은세 저도 노조 법률원을 제일 크게 생각하고 로스쿨에 온 거긴 하죠.

예인 그럼 됐네요.

간사 그 얘기라기보다, 볼 때마다 죽는소리 하니까 걱정되어서. 멘탈을 본받으라는 얘기죠.

예인 그건 어쩔 수 없어요. 로스쿨은 죽는소리 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냥 들어주시면 돼요.

인영 언제든 연락해 주세요. 저는 은세 연락 주시면 언제든지…….

“법을 하면 할수록, 법이라는 게 기댈 게 아니야. 법이라는 건 쓰레기”

인영 그러고 보니 저희 명함을 보시면 “법무법인 여는”으로 되어 있잖아요? 이게 의외로 민주노총 법률원이라고 떠올리지 못하는, 하나의 사고의 걸림돌이 됩니다.

간사 재작년에 우리 진로행사 오신 하태승 변호사께서 양복 차림으로 “제가 일하는 곳은 ‘법무법인 여는’입니다.” 그러시더니 양복을 훌떡 벗자 안에 노조 조끼가 있고 “그리고 민주노총 법률원이라고도 하지요” 이러셔서. (웃음)

예인 뭐야 그게.

133
민주노총 변호사의 명함은 이렇게 생겼다.

은세 퍼포먼스가 좋으셨죠. (웃음) 로스쿨 와서도 노동법학회에서 노조법 2·3조 강연 오셨는데 학생들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인영 그분이 저하고 같은 사무실의 변호사님인데 그 강의를 왜 그렇게 잘 하시냐면, 전국의 노조에서 수십 번을 하신 거예요.

은세 강의도 자주 가시나요?

예인 교육 많이 가죠.

인영 저는 아직 교육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라 제가 해본 적은 없어요.

예인 법률원에 대해 궁금한 것 있으세요?

은세 일하는 게 어떠신지, 만족스러우신지 여쭤보고 싶었어요.

인영 잘 하는 걸 찾아서 오셨다면 송무는 잘 맞을 거라 생각해요. 우리가 익히 경험한 노동 쪽이다 보니 익숙함도 있고, 송무라는 것 자체가 비판할 것 찾고, 사실관계로 반박하고, 문체 수정하고, 134운동권 하며 배워온 스킬들의 집약체라서 재미는 느끼고 있는데. 별개로 운동적인 고민은 같이 가져가는 거죠. 민주노총 법률원도 어쨌든 전문직이다 보니 성찰을 멈추는 순간 타성에 젖어버리기 쉬워요. 법리를 만드는 것으로 뭔가 하고 있으니까 이걸로 된 거야, 노조 분들이 법적으로 문제 안 생기게 하고 있으니까 이걸로 된 거야. 그러면 법이라는 것의 문법 안에서 하는 일들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전도되어 버리는 거예요.

예인 법을 하면 할수록, 법이라는 게 기댈 게 아니야. 이 말 그대로 실어도 돼요. 저는 법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고자 변호사가 된 거라서 원래부터 그걸 알았어요.

간사 하긴 작년에 이수기업 건으로 만났을 때 예인은 자신이 노동운동을 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변호사가 된 거라 그러셨지요.

예인 법이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을 방해하는 걸 막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원래부터 법이라는 게 그런 줄 알고 있었지만, 하면 할수록 더 느껴요. 법 일을 하면 할수록 법이라는 체계 자체가 허황된 거고, 물론 인간 사회에서 어떤 합의된 기준을 만들어서 공권력이 규제하는 거니까 어쩔 수 없는 측면은 있지만, 그걸 받아들이기가……. 법은 어차피 우리 편이 아니라는 걸 늘 경험으로 느낍니다. 법이라는 건 쓰레기예요.

금속노조 변호사 선배의 실전 진로상담. “법이라는 건 쓰레기.”
135

간사 (폭소) 지금 이게 무슨 대화야.

인영 노조 분들에게 안 된다, 안 된다 말해야 하는 순간마다 느끼죠.

간사 뭐가 안 된다는 거죠?

인영 뭐든지. 노조 분들이 뭘 하려는데 법적으로 어떻게 되는지 검토해 달라셔요. 근데 법은 사실 다 안 된다고 해요. 법에 의하면 다 안 돼요. 그런 지점들에서 어려움이 있고.

간사 법이라는 게 가장 마지막에 바뀌는 거잖아요, 항상.

예인 그래서 하면 할수록 법으로는 안 되고 역시 투쟁해야 한다는 생각이 훨씬 강해져요. 이거 하다 보면 투쟁하고 싶으신 분들이 방법을 몰라서 소송으로 싸우는 분들이 있거든요. 근데 그게 법리적으로는 진짜 그냥 안 되는 경우들이 훨씬 더 많은데, 우리가 안 된다고 말씀을 드리면 이해를 못 하시죠, 당연히 노동자 입장에서는. 나는 억울한데 법이 내 편이 아니라는 게. 물론 우리 역할의 최선을 다해서, 뚫을 수 있는 틈을 만들어 드리는 건 기본이지만, 이 일을 하면 할수록 법에 기대기보단 현장에서 움직임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걸 느끼는 것 같아요. 현장에 나와보세요. (웃음)

은세 패소하셨을 때 스트레스 받는 부분은 크지 않나요?

예인 스트레스 받죠. 질 사건들이 많다 보니. 우리는 질 사건들이 많아요. 저도 이번주에 딱 이생각이 들어서 선배 변호사에게 “패소하는 거 너무 스트레스 받는다” 얘기했더니 “패소에 익숙해져라” 그랬어요. 우리는 그런 일인 것 같아요. 조사병단 아세요?

136

은세 『진격의 거인』?

예인 (변호사) 선배가 그 짤을 보내줬어요. 이거요. “조사병단은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거든”.

인영 나도 보내줘 그거. 저는 1년차라서 패소는 아직 경험해 본 적이 없는데.

예인 신입들한테는 이길 일만 주거든요.

변호사들의 부적이라기에는 심히 미묘한(?) 내용.

간사 현장에 나갈 일은 자주 있나요? 가령 (이수기업 수건띠 들어 보이며) 이 경우처럼.[5]

예인 투쟁이 벌어지는 곳에 법적 조력이 필요하면 가기도 하죠. 대책위 같은 곳에 변호사들이 한 자리씩 가기도 하고.

인영 제가 소속된 법률원의 사업장에서는 유의미한 투쟁이 지금 크게 있지는 않아서 사건으로서 현장에 결합한 경험은 저는 아직 없어요. 총연맹은 민주노총 본부 차원의 사업들에 많이 결합하기 때문에. 최근에는 노조법 2·3조 관련해서 많이 했었고.

간사 총연맹 법률원하고 금속노조 법률원은 차이가 많이 있나요?

인영 차이가 많은 것 같은데. 저희는 미조직된 개인 노동자 대리도 많고, 작은 신생노조라던가 지역에 흩어져 있는 노조, 민주일반이나 민주연합 같은 그런 노조들의 것들을 종합적으로 하다 보니까 137사건의 유형이나 같이 하는 노조 같은 게 특정되지는 않아요. 금속법률원하고는 노조와의 결합도라던지 맡게 되는 사건의 성격이 많이 다르죠.

은세 예인은 처음부터 산별로 가려고 하셨던 건가요?

예인 보통은 TO가 나는 대로 가게 되는 것인데, 저는 여기 오고 싶다고 계속 그랬어가지고 희망하는 대로 잘 온 케이스인 것 같아요.

은세 총 몇 분 정도 계신가요?

예인 총연맹, 금속, 공공, 서비스 다 합쳐서 변호사 40명.

인영 노무사 30명, 송무직원 30명까지 해서 전체 인원은 100명이 넘어요.

은세 마흔 분이나 계시면 규모가 굉장히 크네요.

예인 궁금한 것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마지막 질문 있으신가요?

은세 로스쿨 생활에 대해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신가요 혹시?

간사 너무 사리사욕이다.

예인 활동을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생각하면 좀 편해요. 4-5월이 원래 뭐가 많잖아요. 세월호, 4·19, 노동절, 광주, 뭐가 많은데. 그때마다 늘 행사를 기획하고 연대방문을 가고 집회를 갔는데, 로스쿨 가니까 그걸 못 가서 너무 우울한 거예요. 그런데 제 오빠가 활동가인데, 우울한 절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너는 지금 책상 앞에서 공부하는 게 네 활동을 하는 거”라는 거예요. 저는 원래 그게 기만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그냥……. 그렇게 생각해도 나쁠 138것 없더라구요! 어차피 여기 있고 어차피 당장 나갈 것 아닌데. 그냥 나는 지금 준비를 하고 있는 거다. 사람은 누구나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준비가 필요한데, 나는 그냥 지금 그 단계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나아졌어요.

인영 난 그게 스스로를 기만하는 거라고 생각했고 스스로를 기만하며 3년 살았어요. 그래서 난 오히려 힘들었어.

예인 나도 힘들었어.

인영 특히 윤석열 탄핵 국면 때 너무 힘들었어요. 세상이 요지경인데 내 머릿속에서는 한 달 남은 변시 걱정을 하고 있구나. 이런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한 거예요.

예인 일휘와 우연히 거리에서 만났던 작년 1월 시점에 이 친구는 시험 보는 중이었지요.

인영 3년을 자아를 죽인 채 거의 좀비로 살고서 변시를 붙고 채용단계가 왔어요. 자소서를 써야 하는데, 진짜 너무 낯선 거예요. 언어를 빼앗겼어. (은세 웃음) 학부생 때 썼던 글들을 봐도 이게 나라고? (은세 폭소) 내가 이런 글을 썼다고?

은세 이거 정말 맞아요. 문장이 안 나와요. 여름호 원고 쓰기도 그래서 너무 힘들었는데.

예인 맨날 “정당하지 않습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밖에 안 나와.

인영 아무튼 저는 너무 힘들면 상담을 찾으시라는 걸 꼭 말씀드리고 싶고. 조금이라도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한둘이라도 있으면 좀 낫다. 근데 이미 너무 잘 하고 계신 것 같아서. 학회도 있으시고 비서공에도 간접적으로라도 계속 관여하시고 하니까.

139

은세 오늘 너무 좋았어요.

인영 그러게요. 그때 한번 도망치듯이 밥 사드린 이후에 은세 다시 못 뵈었는데.

예인 마음의 짐이었구나.

간사 외투 입으시기 전에 조끼 차림으로 기념촬영 하나 합시다. 촬영소품도 챙겨왔어. 자랑스러운 우리 깃발.

예인 우와, 오랜만이다. 이 깃발 도안 만드신 분도 지금 법률원에 계세요.

인영 누구?

예인 김상연 변호사. 이거 만들고 군대 갔어요. 지금도 법률원에서 열심히 디자인을 하고 있어요.

헤어지며

예인 그런데 이렇게 세대가 다른 사람들이 만나고 비교를 해서 도출하려고 하는 게 뭐죠?

간사 각자의 상이한 경험들에서 남길 수 있는 것을 남겨야 하니까. 경험이나 암묵지(暗默知)가 사람들이 오고갈 때마다 없어지잖아요?

은세 암묵지가 진짜 너무 많이 없어졌어요.

간사 없어지는 건 없어지는데, 그건 어쩔 수 없는 건데. 그 중에 어떻게든 명시지(明示知)로 고정시킬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고정을 시켜놓아야 후대에 가서 그걸 레퍼할 수도 있고.

예인 그럴 수 있겠네요.

140

간사 『물까치』를 시작한 것도 그래서죠. 고민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는 게 필요한데, 그 순간의 고민과 생각들은 흩어지고 휘발되잖아요. 글로 남겨야 미래로 전해지죠.

인영 그런 목적이면 이런 좌담도 좋지만, 지금 비서공에서 계속 활동하시는 분들과 과거 활동하던 사람들의 만남을 조직해 보는 것도?

예인 근데 우리한테 배울 게 있나? (웃음)

간사 그런 자리를 만들 수 있다면야 아주 좋은 일이겠지요. 만나는 자리 자체가 큰 도움이 될 테고. (은세 보고) 그리고 이제는 본인이 그런 선배가 되어 주셔야 할 때고.

예인 그쵸 그쵸.

은세 노력해 보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들 이런 고민을 했다는 걸 들은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내가 혼자 길을 잃은 게 아니라 이 자리를 거쳐간 사람들이 다들 그랬다는 사실이.

예인 이런 세대별 비교가 의미가 있으려면, 단순히 비교해서 이 때는 잘 됐고 저 때는 안 됐고 지금은 힘들고……, 그런 게 아니라. 다들 각자의 고충이 있었고 그 조건에서 무언가 해내려 했음을 도출하는 게 중요할 것 같고. 그런 만남이라면 할 수 있을 듯.

인영 저는 그분들이 먼저 활동했던 사람들의 말을 듣고 싶고 공유받고 싶은 게 있다면 언제든지 같이 얘기해 볼 의향이 있어요. 아까 말했듯이 각자의 활동 경험이 다르면 그걸 들으면서 확장될 수 있으니까.

예인 근데 그런 건 대충 하시고. 선배 만나는 건 대충 하시고. 조직 안에 지금 있는 사람들 챙기는 게 더 중요하다.

141

간사 바쁜 와중에 시간 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은세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기획좌담 기념사진.
길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가면 길이 된다. 상이한 경험의 궤적을 가진 우리라는 길들이 겹치고 만나 더욱 넓은 길 위에서 하나되기를 바라며, “투쟁!”

×  (편집부) 총학생회(당시 총학직무대행 단과대연석회의)가 마지막으로 비서공 가맹을 유지했던 것이 2021년 1월 제5차 총회, 단과대·과반학생회들이 마지막으로 가맹을 유지했던 것이 2023년 3월 제10차 총회였다.
×  이은세, 「이만치 떨어져 바라보는 그 사이들」, 『물까치』 1, 115-135쪽 참고.
×  (편집부) 2025년 12월 10일 롯데백화점 잠실점에서, 노조 조끼를 입은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지회 조합원과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이수기업 정리해고 규탄 몸자보를 입은 연대시민의 출입을 보안요원이 제지한 사건이 있었다. 12월 12일 이수기업 해직노동자들이 전개한 항의행동에 비서공도 함께했다.
×  (편집부) 잔디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학생을 본 총장이 행정관 4층 창문을 열고 삿대질하며 “내 잔디에서 나가!”라고 외친 것이 유래가 되었다는 도시전설이 있었으나, 이제는 이 전설마저 ‘총장잔디’라는 이름과 함께 잊혀져 간다. 『대학신문』 기사에 따르면 ‘총장잔디’라는 이름은 늦어도 90년대부터 이미 사용되어 왔는데, 과연 어느 총장인지 진실은 저 너머에.
×  (편집부) 이예인 변호사는 2025년 4월 4일 현대차 사내하청 이수기업 해직노동자들이 고양 킨텍스 모터쇼에서 복직 요구 피켓 시위 도중 연행당했을 때 연락을 받고 경찰서로 달려가 접견한 담당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