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권 제2호) 야근 중에 쓰인 글
야근 중에 쓰인 글
늘 후배 하나한테 이제 학생 말고 노동자 입장에서의 노학연대를 해야 할 때가 아니냐고 닦달하지만, 사실 노동자 입장에서의 노학연대는 쉬운 일이 아니다.
‘노학연대’라고 할 만한 무언가를 처음 해 본 건 2017년 서울대학교 비학생조교 파업 때의 일이다. 당시 난 대학원생이었다. 그리고 대학원생이란 무엇인가 하면,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소식에 제일 느린 사람이다. 어느 날 메일함을 보니 방장님으로부터 메일이 와 있었다. 뭔 일인가 해서 메일을 열어보니, 비학생조교 해고에 반대하여 우리 조교님이 자리를 비우게 되었으니 지지해달라고 쓰여 있었다. ‘아니 이게 뭐야’ 하고 행정실에 가서 우리 조교님을 찾으니 안 계신다. 우정원(153동)[1]에서 농성 중이시란다. 그리고 난 그 학기에 프로포절을 해야 했다.
연구실 사람들과 함께 과자를 싸들고 우정원으로 부랴부랴 갔다(연구실 과자였다. 대학원생은 돈이 없다). 우정원에 들어서니 로비 전체가 돗자리와 담요로 덮여 있고, 그 위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우리 과 조교님을 082찾으려고 헤매니, 저 구석에서 누가 손을 흔든다. 아, 옆 학과 조교님이다. 돗자리 사이를 조심조심 걸어다니는 연구실 사람들을 보고 우리 조교님을 막 데려오시더니 말한다. 이 분 찾아온 첫 번째 학생이 우리라고 한다. 학생들이 그렇게 많이 찾아오는데, 우리 조교님은 아무도 안 찾아와서 속상해하셨다고 한다. 그 얘길 듣고 주변을 둘러보니, 로비의 절반은 학생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옹기종기 앉거나 서서 각자 자기 조교님과 이야기 중이었다. 늦어서 죄송하다고, 일하다 방금에야 소식을 처음 들었다고 말씀드리며 그제야 자세한 사정을 들었다. 프로포절할 때 해야 할 내용도 인수인계 받았다. 이제 겨우 3월이 되었는데, 돗자리와 담요는 너무 추워 보였다. 한참을 얘기하고 또 오겠다고 한 뒤 나오니, 우정원으로 끊임없이 찾아드는 인파가 보였다. 다들 학생이었다.
![]() |
| 2017년 3월 2일, 우정원 5층 ‘비학생조교’ 농성장을 방문한 당시 시흥캠퍼스 추진 반대 본부점거본부 학생들. |
그 뒤로 세 번인가 네 번인가를 더 갔다. 아버지 홍삼을 훔쳐서 들고 가고, 전기담요를 들고 가고, 뭐 그런 식이었다. 농성은 곧 종료되었다. 우리 조교님은 자필 대자보를 학부 건물 로비에 써 붙였다. 지지해주는 학생들 덕분에 용기를 내서 더 싸워보겠다고 쓰여 있었다. 나중에 따로 전해주셨는데, 저 “지지해주는 학생”이 나였다. 내가 제일 자주 왔었단다. 프로포절은 잘 되어가냐고 물으셨다. 아니, 그럴 리가요.
추가 교섭을 하기로 하고 농성은 종료되었지만, 교섭은 만만하지 않았다. 내 프로포절도 만만하지 않았다. 행정 처리를 스스로 하게 된 교수들은 예민해져 갔다. 행정실에 가면 까만 리본이 잔뜩 있었다. 비학생조교 파업을 지지하는 리본이었다. 그걸 6월까지 달고 다녔다. 중간에 해어져서 리본을 한 번 바꾸기도 했다. 당시 교정에선 같은 리본을 가방에 단 학생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아, 프로포절은 망했다. 내용은 좋았는데 절차가 엉망이라고 한 소리 들었다. 내 탓 아니거든? 학교가 비학생조교 분들을 해고하려 하지만 않았어도 절차 잘 지켰을 거거든?
뭐, 이런 게 내 첫 노학연대의 기억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학생’이라는 지위로서 ‘노동자’와 연대한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때의 연대는 참 쉬웠다. 쉽고, 정확했다. 안타까움에 공감하는 것은 자비를 베풀듯 부담이 없었고, 과자를 들고 가 나누는 것은 적선이라도 하듯 간단했다. 그게 과연 연대였을까? 나는 연대를 한 게 아니라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나라는 우월감에 취해 있던 게 아닐까?
비서공에 들어올 정도로 사회에 관심이 많고 참여와 실천을 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전업 활동가가 되거나 그에 준하는 방법으로 활동을 돕는 진로를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당신도 나처럼 그냥 노동자(전업 활동가나 그 저변의 변호사·노무사·기자 같은 직군이 아니라는 의미에서)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노동자로서 살아남는 건 정말 쉽지 않다.
084어떤 동지가 말했다. “시위 현장은 무균실 같다”라고. 나도 동의한다. 집회 현장이나 노조, 시민단체, 운동권 동아리들 같은 곳은 뭐랄까, 공기가 청정하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아닌데?”라고 바로 반박하겠지만, 솔직히 운동권은 운동권 바깥 여집합의 사회에 비하면 한참 무균실에 가깝다. 퀴어임을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고,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게 당연하고, 나의 가치관을 내보여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사회에 나가 노동을 하게 되면, 더이상 그런 공간에 있을 수 없다. 우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내가 제어할 수 없게 된다.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고 살 수 없게 된다. 솔직히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 같은 사람은 이 사회에서 수적으로 소수다. 그리고 돈을 벌려면 다수자들의 세상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차별과 혐오가 촘촘히 쌓이고, 불합리에 화를 내는 게 오히려 욕을 먹는 사회. 그것이 안온하고 온건한 세상. 이런 데서 살아남는다는 건, 생일에 파리바게뜨 케이크를 깜짝 선물로 받아 거절도 못하고 다 같이 나누어 먹은 뒤 몰래 화장실에서 울며 토하는 일이다. 전쟁 소식을 들으며 방위산업체 주식 얘기를 하는 걸 참고 들어줘야 하는 일이다. 엡스타인 파일이 공개된 날 테슬라를 사겠다는 결심을 듣는 일이다. 고생 많다며 받은 음료수 성분표에서 이스라엘산 오렌지를 발견하는 일이다. 남녀 사이에 친구 없다는 소리를 흘려들어야 하는 일이다. “동성애자는 더럽지 않냐”라는 말에는 참지 못해 반발할 때도 있다. “누구는 비정규직이라서 일을 못한다”라는 말은 너무 자주 들어서 이제 반박하는 것도 지친다.
그리고 가장 끔찍한 것은 바로 내가 자본주의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에 나가 돈을 번다는 건 자본주의 체제 안에 편입된다는 것이고, 나의 소비뿐만이 아니라 생산도 정의롭지 못하게 된다. 망해버렸으면 하는 이놈의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나를 깎아내고 있다. 순간순간이 모멸의 연속이다. 나의 노동은 착하지 않고, 정당하지 못하다. 085자기혐오는 거듭되고 심화된다. 반드시 AI를 사용하라는 윗선의 말에 프롬프트를 작성하면서 AI가 심화시키는 자본제국주의에 대해 생각한다. 하지만 사용을 멈출 수는 없다. 이미 생산 시간은 AI에 맞춰서 조정된 지 오래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며 다수자들의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학생 시절엔 단순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을 이제 복잡하게 이해하게 된다. “누구는 차별과 혐오를 하지만 좋은 사람인 면도 있어”라는 식의 소박한 이해가 아니다. 사람을 특성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사람은 좋고 나쁨이 없다. 사람의 면모는 무한할 정도로 다양해서, 어느 하나를 가지고 평가할 수 없어진다. 시험 만능주의에 빠져 비정규직을 혐오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회의를 같이 할 수 있다. 성소수자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생일을 축하할 수 있다. 노조를 싫어하는 사람도 바빠보이면 안쓰럽다. 하루종일 주식 얘기만 하는 사람이 먹고 힘내라며 주는 과자를 기껍게 받을 수 있다. 이해하면 애정이 생긴다. 다수자들의 세상에 대한 증오가 점점 옅어져 간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다.
사회생활 스킬이 늘어가면 이 속에서 적응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케이크는 원래 싫어해서 안 먹는다고 공표한다. 주식 얘기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로 돌리거나 청소하러 간다고 자리를 피한다. 이스라엘산 오렌지가 들어간 음료수는 공용 냉장고에 넣어두고 자연스럽게 잊어버린 척 방치한다. 남녀 사이 친구 없다는 말은……음, 그건 방법이 없다. 그쪽은 진짜 이해시키기 어렵더라. 그래서 그냥 내가 친구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가끔은 포기도 해야 하지 않은가. 이렇게 ‘조금 괴짜이지만 재미있는 사람’이 되어가며 역경을 헤쳐나간다.
그렇게 ‘노동자’의 세상을 이해하고 거기 적응하게 되면, 더이상 학생과 연대하기가 쉽지 않아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생산자고, 학생은 소비자다(물론 노동하는 학생들, 노동자성이 있는 학생들도 있지만 086대별하자면 그렇다). 흔히들 소비자만 생산자를 혐오하는 줄 알고 비판하지만, 사실은 생산자도 소비자를 혐오한다. 카페 알바생이 손님을 좋아하기 쉽지 않은 것처럼. 이렇게 연대에도 계급이 발생한다. 자본과 노동의 단순하고 명쾌한 대립이 아니라, 소비자와 생산자라는 미묘한 계급이 자리한다. ‘노동자’들은 학생의제에 미적지근하게 반응한다. “저게 뭐라고 유난을 떠냐” 하는 반응이나, “나 때는 다 참고 살았는데” 하거나, “일을 안 해봐서 어떻게 세상이 굴러가는지 모르고 해달라고 징징대기나 한다”라는 그런 반응들을 보고 듣기 쉬워진다. 나이가 어린 것에 대한 혐오와, 생산하지 않는 것에 대한 혐오가 뒤섞인다. 혐오당하는 학생이라고 그걸 모를까? 당사자니만큼 제일 잘 안다. 그렇게 서로 멀어진다. 학부생 시절 시흥캠퍼스에 반대하며 천막을 세웠을 때,[2] 기성회비 쓰임을 밝히라 시위했을 때[3] 교직원들의 반응을 나는 기억한다. 자신들의 이익에 관련된 의제가 아니면 철저한 무관심으로 반응했다. 좀 귀찮아했던 것 같다. 짜증내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이제는 그때 그 ‘노동자’들의 입장을 이해한다. 소비자가 요구하는 모든 건 내 업무가 된다. 업무가 더 주어지지 않으면 좋겠고, 하는 일이 변하지 않았으면 한다.
변화를 요구하는 모든 것이 짜증을 유발한다. 그게 더 나은 사회를 향하는 길이라고? 저들 때문에 지금 추진하는 정책이 바뀌면 그대로 내 야근이 될 텐데 지금 그게 중요할까? 같은 논리로 하청업체의 시위도 싫어지고, 노조도 싫어진다. 내 추가업무를 유발하는 측에 공감하기란 087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그들을 위해 기꺼이 내가 더 일을 많이 하겠다고 나서는 건 멍청한 짓이고 말이다.
이런 식으로 사회를 살아가다 보면, 다수자를 미워하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된다.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시위에 참여해서 떠밀치고 들려 나가면서도 경찰을 미워하지 않고, 서교공(서울교통공사)을 증오하지 않는 법을 차차 알게 된다. 그들도 사람이고 노동자임을 알게 되는 순간, 마냥 미워하기란 참 어려워진다. 화가 나고 욕을 하겠지만, 그 화가 금방 사그라든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다. ‘노동자’들에게는 ‘연대’하는 것 자체가 추가 업무다. 그리고 일은 누구나 하기 싫어한다. 나도 그렇게 되었다.
![]() |
| 2025년 4월 22일,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의과대학 및 서울대병원) 교문 앞에서. 혜화역에서 시위 중 강제퇴거당한 뒤 옮겨왔다. 가운데 우산 쓴 이가 보리. 오른쪽은 전장연 박경석 대표. |
그래도 이해는 이해에 불과하고, 그렇게 살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소소하게 노학연대를 하겠다고 나서곤 한다. 이제는 노동자로서. 등록금 투쟁에 관심을 가지고 “요새 등록금 너무 비싸다”라고 주변에 말한다. 교수를 초빙할 일이 생기면 기사를 면밀히 조사해서 대학원생 관련 사건사고가 없었는지 확인한다. 겸사겸사 김박사넷도 보면서 거른다. 동문들과 만나서 동덕여대 시위에 대한 비하 발언을 들으면 “그래서 넌 성낙인을 좋아한다고?”라는 말로 반박한다. 그리고 시위에 나간다. 이수기업 해고철회 몸자보와 동덕여대 해방 머릿수건을 함께 두르고 마라톤을 뛴다. 여학생회 강제 해산에 반대하는 서명을 한다. 가방에 목화를 단다.[4] 어떤 노동자는 학생 의제에 연대함을 알린다.
![]() | 2025년 6월 8일, 상암경기장에서 열린 ‘이것저것 연대하는 말벌시민 청춘런’에 참여한 보리. (촬영: 비주류사진관) |
구구절절 얘기했듯이, 노동자로서의 연대는 참으로 어렵고 힘들다. 연대라는 돈도 안 주는 추가 업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 그 추가 업무가 소비자를 향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그래서 오히려 연대해주는 사람들에게 그만큼 감사하게 된다. 찾아와서 고생한다는 말 한마디만으로 맺힌 게 내려가고, 같이 화내주는 것만으로도 이긴 것 같다. 홍삼을 들고 찾아온 나를 보고 울던 비학생조교님을 이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연대는 그렇게 무거운 것이다. 그래서 그만큼 가치 있다.
그래서 언젠가 당신도 노동자가 한 번 되어봤으면 한다. 그렇게 노동자를 한 번 이해하게 되었으면 한다.
부기(附記)
교정쇄를 받아보았는데 필진 약력이라고 온갖 걸 다 써놨길래 기겁해서 다 지워달라고 요청했다가, 간사와 상의해서 현재 직장에서 노조 지부장을 하고 있다는 한줄만 남겼다. 그럴싸한 전현직 직함들이 올라와 있는 그게 거짓 이력은 아니지만 지워야만 했다. 이력은 어떤 사람에 대한 대략적인 판단과 기대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 이력들을 읽고 사람들이 기대하게 될 사람의 상은 내 진짜 모습과 꽤 거리가 멀다.
시위에 나가기 시작한 건 대학생이 된 이후다. 그때는 나 같은 사람을 부르는 말이 없었다. 시위 문화나 노조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고, 민중의례는커녕 〈임을 위한 행진곡〉도 몰랐다. 자리에 앉아 피켓 주는 걸 받아 같이 들고 있는데 노래를 부르더라. 다들 부르길래 나도 그냥 떠듬떠듬 따라 불렀던 기억이 난다. 내가 가사를 모르자 옆에서 핸드폰에 검색해서 보여주었다. 그때쯤 스마트폰이란 게 대중화되기 시작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시위를 왜 하는지만 알았지, 누가 하는지도,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다. 천막을 치는데 용역들이 몰려와서 막으려고 090일어서니 양옆 사람들이 함께 팔짱을 껴줬다. 그게 ‘스크럼’이란 걸 한 10년 뒤에야 알았다. 노조가 뭔지는 몰랐지만, 광화문에 가면 조끼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뭐하나 유심히 보다가 대충 의제에 공감하면 옆에 가 앉았다. 그러면 또 모르는 사람이 달려와 피켓을 줬다. 같이 들고 소리치다가 해산하기 전 빠르게 피켓을 반납하고 놀러 갔다.
세월호 무렵부터는 좀 더 조직적인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그 때 처음으로 집시법이란 걸 배웠다. 연대가 이루어지는 것도 보았다(‘연대’라는 단어도 나중에 배웠다). 내가 배운 모든 건 시위 현장에서 배웠던 것이다. 이론은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그러다 사람이 부족하다고 총학생회 집행부에 끌려갔고, 정파라는 게 있다는 것도 그때야 알게 되었다. NL이니 PD니 하는 것들이 있고, 서로 사이가 안 좋은 모양이었다.[5] 그래서인지 학생회에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속한다고 느끼지 못했다. 난 이방인이었고, 그들에게 어떤 이름으로도 불리지 못했다.
그때는 “시위를 왜 나가냐”라는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취미동아리 동방에 피켓을 들고 들어갔을 때, 시위에 나가는 걸 부모님께 들켰을 때, 어느 날 신문에 난 사진에 누가 봐도 나인 사람이 찍혀있을 때……. 그럴 때마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난 시위 나가는 게 취미야.” “난 싫어하는 걸 싫어한다고 말하는 걸 좋아해. 기왕이면 크게 말하고 싶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내가 싫어한다는 걸 알게 하고 싶어.” 뭐 그런 성격 나쁜 말들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다들 “희한한 사람이네” 하고 넘어갔다. 언제나 “또라이냐”는 소리를 들었다.
12·3 계엄 이후 처음으로 나 같은 사람을 부르는 말이 생겼다. ‘말벌동지’라고 하더라고. 이름이 생기면 사람들은 인식을 하게 된다. 난 더 이상 시위 현장에 조용히 등장했다가 끝나기 전에 서둘러 사라지는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사람들이 이름을 물어보고, 얼굴을 인식했다. 몇091번 만나자 아는 동지들이 생기고, 이런저런 모임에 나가면서 속한 단체가 생겼다. 내가 쓴 이 글의 내용도, 그렇게 활동가들과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생각하게 된 것 중 하나다. 노동자와 활동가는 생각보다 멀더란 말이지.
그럼 나는 ‘말벌시민’이 된 걸까? 글쎄? 일단 “노조 집행부를 하는 주제에 말벌시민은 절대 아니”라고, “사기치지 말라”라고 구박하는 후배가 하나 있기도 하고, 솔직히 나도 그 말에 공감한다. 누가 나를 “말벌시민님”이라고 칭하는 게 싫어서 시위 나갈 때 괜히 노조 조끼를 입고 다니기도 했다. 그들과 교류하면서 느끼지만, 나는 ‘말벌시민’이라고 불리기에도 또 안 맞는 게 참 많다.
그럼 난 뭘까? 이에 대해 꽤나 오래 생각해봤다. 내가 ‘말벌시민’이 아니란 걸 느꼈을 때부터, 나를 정의하는 건 무엇일지 과거를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나서야 학창시절 가볍게 생각 없이 뱉은 말이 사실은 가장 진솔한 말이었다는 걸 알았다. 때로는 직관이 사유를 이긴다.
난 ‘시위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싫은 걸 싫다고 크게 말하고 싶고, 그걸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그러니 다른 이력보다는 이 표현으로 나를 생각해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