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까치』 №03 §017 「사람이 몰리면 어그럭거리는 너 나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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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몰리면 어그럭거리는 너 나 우리

진제헌

비서공 활동회원

비서공 파견 학소위 운영위원

입학한 뒤로 3번의 정규 학기가 지나갔다. 그 말은 비서공에 들어온 후로 3번의 정규 학기가 지나갔다는 뜻. 학소위 파견인은 두 학기째. 입학 후 두 번의 서퀴(서울퀴어문화축제)가 있었다. 첫해에는 부스를 거의 돌지 못하고 팔레스타인 긴급행동, 서울퀴어문화축제 행진만 참여했으니 올해 있었던 서퀴가 최초의 본격 서퀴인 셈이다. 착장은 평소와 같이 했고 부적으로 박지리 작가의 소설 『번외』를 챙겼다. 『번외』는 완전히 주관적인 기준에서 지금까지 읽어본 가장 훌륭한 ‘찐따’ 소설이다. 더 세세하게 따지자면 ‘쿨찐계’에 해당한다. 부득이하게 전문용어를 사용하는 점 양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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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퀴 부스존에는 11시 반 즈음 도착했다. 그나마 사람이 몰리지 않는 시간대여서 부스를 조금 돌았다. 최근 들고 다니는 무지개 고양이 보따리를 구매한 부스가 어디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얼레벌레하다가 부스명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벨링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이 많을 것은 알지만, 부스와 깃발을 보다 보니 당연히 내가 지닌(속한? 어찌 되었든) 정체성들을 떠올려 봤다. 자긍심pride을 강조해온 퀴어 운동에 포함되지 018못하거나 적극적으로 배제당하는 정체성은 많을 것이다. 웃기는 예시로는, 이번 서퀴에 등장했던 “윤석열 완식 게이 협회”라는 깃발이 트위터에서 사람들에게 규탄받자 기수가 사과문을 올린 일이 있을 것이고, 웃기지 않은 예시는 별로 거론하고 싶지 않다. 성적 지향을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하지만 윤석열이 취향인 사람은 존중받을 수 없다니. 나도 ‘퀴어’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 가장 두드러지는 정체성은 ‘찐따’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지닌, 속한, 어떤 관계이든 ‘찐따성’과 맺는 관계에 있어서 자긍심을 가질 수 없다.

2026년 6월 13일, 제27회 서울퀴어문화축제 행진 대오 가운데 비서공 깃발. 서울대 중앙몸짓패 골패 깃발, 페미니즘 동아리 달 깃발, 서울대 학소위 깃발도 보인다.

찐따성에 대해 생각해보자. 찐따는 아주 넓은 범위를 지시하지만 나름대로 공통적인 의미는 ‘집단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 서울대학교, 각종 동아리, 비서공, 비서공이 활동하는 장소들, 또는 019그냥 사람이 몰리는 공간들. 나름대로 공유되는 언어가 있으며 성문화됐든 아니든 규칙이 존재하는 장소들. 일차적으로 찐따는 그 규칙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말을 거는 방법이라거나 그런 것들. 규칙을 배우려고 한다면야 배울 수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찐따는 ‘규칙을 배운다’로 나아가지 않는다. 사회적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주고-받기일 테다. 그리고 찐따에게는 ‘주고’와 ‘받기’ 사이에 연결부호가 놓이는 일이 요원한 것 같다. 주는 행위가 있고 받는 행위가 있다. 이 끊어진 연결 속에서, 사회적 행위들의 발생은 필수적이어야 하겠으나 일어나지 않는다. 주고-받기가 성립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기’를 지속적으로 제공하며 관계를 이어나가는 경우는 거의 존재하지 않으므로 빠른 시일 안에 고립되어 버릴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억압을 가장’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겨우 그런 것 하나로 고립된다니 아무래도 상상력도 부족하고 배부른 소리지. 존재하지도 않는 억압을 받는 이 기분은 내가 스스로에게 가하는 억압일 것이다. 억압을 가장하는 이유는 아마도 나의 ‘찐따됨’을 규명하고 싶은 욕구에 있을 것이다. 행위 방식에 의해서 찐따로 규정되는게 아니라, 찐따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의 행위를 한다고 하면 편하니까. 왜 집회에서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하는 것인지, 왜 선전전 앞을 지나갈 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것인지(왜 뭔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까?), 왜 관계를 맺거나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모르겠는 것인지, 왜 문답 형식이 아닌 대화는 도저히 갈피가 잡히지 않는 것인지,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도 답을 내고 싶은 듯하다. 대화 불능감을 느끼는 것이 저 모든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되는 근본 원인으로 보인다(순서가 어떻게 되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가 일어나야 할 때는 여러가지 인터넷 밈meme을 쓰는 편이다. 밈 역시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규칙이 있지만 밈의 규칙은 대화의 규칙보다 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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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밈을 통한 발화쌍도 문답 형식으로 여기는데, 정해진 구조 안에서 말을 바꿔 끼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밈을 알고 있는 사람, 밈을 쓰는 사람, 인심 좋은 사람 누구든 골라잡아도 비슷한 문답을 주고받을 수 있다. 이런 발화법에 익숙해지다 보면 문제가 생기는데, 트위터나 디씨인사이드 같은 인터넷상에서야 밈-문답쌍을 통해서도 사회적 상호작용이 발생하는 듯한 감각을 얻을 수 있지만, 오프라인의 집회에서라거나 각종 집담회, 수업에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질 않는 것이다. 밈을 알고 있는 사람을 발견할 확률이 너무 적고 혹시나 있더라도 밈이 그 장소의 맥락에 들어맞을 일이 별로 없으니까. 1학기에 수강한 수업에서 포켓몬을 아는 사람이 희박하고 건담을 아는 사람은 없을 때 실감했다. 집회에서야 포켓몬이나 건담을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긴 하지만서도.

물론, 대화법을 모른다거나 하는 문제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정신을 차린다’는 등의 방법으로 해소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저런 뒤풀이에서 ‘운동권 덕목’을 나열하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그 항목이 〈수저 놓기〉, 〈물 따르기〉 등 밥상 예절인 것이다. 이런 말이 굳이 나오는 현상의 의미는 무엇일까? 요즘 기본적인 예절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면서도 ‘찐따성’을 희석하려는 익명화된 의지가 표출되는 것이다. 찐따라고 해도 (찐따가 아니고 다른 경우라고 하더라도) ‘보통의 경우’처럼 기능하게 하겠다는 의지. 많은 창작물들도 이 ‘정신차린다’의 방법을 사용한다.

자아비대와 자존감 결여의 공존이 특징적인, 일본 아니메 ‘찐따’ 남자 주인공의 계보.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 아니라 연대를 두려워해서 고립에 (자의 또는 타의로) 처한다. 그런데 이들의 ‘찐따성’은 결국은 연대(의 최소단위로서의 소통·연애)를 구함으로써 ‘극복’되는 대상이다.

만화 『내 마음의 위험한 녀석』에서, 중학교 입시에 실패한 후 같은 반 학생을 칼로 난자하는 상상에 몰두하던 이치카와 쿄타로는 느린 템포의 ‘boy meets girl’[1] 전개를 통해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친구를 021만들면 인간강도(人間強度)가 떨어”지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와 단절하던 『모노가타리 시리즈』의 아라라기 코요미는 괴이(괴물, 귀신, 요괴 등)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정신을 차린’다. 하네카와 츠바사라는 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의 히키가야 하치만은 코요미와는 비교도 하기 어려운 ‘쿨찐력’을 구가하다가도, 일련의 사건 끝에 찐따 같은 자신마저도 긍정한다. 이건 하치만의 동아리 담당 선생님 덕분이다. 보다 옛날 작품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의 대표로 과대 호명되는 『에반게리온』도 그렇다. 구(舊)극장판에서 신지는 인생이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이라는 것을 ‘깨닫고’ 서드임팩트를 번복해 그 이후를 살아가며, 루프물인 신(新)극장판에서는 루프를 깨고 022결국 에바라는 ‘허구’가 고안되지 않아도 되는 세계, 그러니까 ‘현실’에서 새로운 캐릭터와 함께 어른이 되는데 성공하지 않던가. 더 거슬러서 「기동전사 건담」에서는 기계와 회로에만 몰두하는 히키코모리 아무로 레이가 소통과 이해의 신인류 ‘뉴타입’으로 거듭나지 않던가. 그리고 이 모든 일들, 이 해소/해결/엔딩들이 친구 좀 생겼다고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이런 식이면 안 되지!

찐따성으로 모든 특성을 수렴해버리는 것(모든 고통이 찐따성에서 비롯된다거나 찐따성을 기준으로 다른 정체성을 줄 세운다거나)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일종의 정상 서사, 성공 서사에 따라 찐따성이 극복되어야 하는 것으로나 다뤄지는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찐따가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 당연히 찐따가 찐따인 채로는 서사라든가 관계라든가 하는, 창작물을 구성하고 진행시키는 힘이 발생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창작물이 정말로 만들어진다고 해도 캐릭터만 덩그러니 남아서 중얼중얼거리게 되겠지. 내게는 최인훈의 『서유기』가 이렇게 읽힌다.[2] 그렇지 않은 예시도 있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찐따가 등장하는 창작물에서 절대 다수가 ‘찐따로서 자기 자신도 긍정하지 못했던 그 시기’를 ‘극복’하고 자긍심을 가지게 된다니. 이야말로 거부당하고 부정당하고 고정당하고 도식화된 찐따성이지 않나. 정상성에 포획된 찐따성을 구출하라! 오타쿠들이 보기 좋게 가공된 ‘찐따성’은 기본적으로는 ‘알고 보면 좋은 사람’으로 설정된 캐릭터의 ‘좋은 점’(이 좋은 점은 예를 들어 “상냥하다”거나 “생각이 깊다”같은 것이다. 오타쿠가 찾아낼 수 있는 자기 긍정을 투사한 것들로도 볼 수 있겠다)에 접근하는 길을 감싸는 포장지 정도가 된 것 같다. 그 포장지에 공명하고 창작물을 향유하던 나와 같은 사람은 포장이 벗겨진 후의 현실을 마주해야만 하는 것이다. 023보통 “[이름]군,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상냥해……”하고 홍조를 띄우는 사람 같은 건 없다……. 그런 사람은 존재해서는 안 되니까……. 그런 사람이 중등교육과정에서 우연히 나타나 찐따성을 고치는 연쇄반응을 만들어낸다? 어림도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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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번외』는 특별했다. 책에서 진행되는 일들은 모든 서사가 끝난 뒤의 일이다. 여기서 서사는 명문 고등학교에서 진행됐다. 서술자(이름이 나오지 않는다)와 같은 영화 감상 동아리를 하는 K가, 현장체험학습에 참여하지 않고 학교에 남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화를 보여준 후 총으로 서술자를 제외한 모두를 쏴죽인 일. 명문 고등학교에서 총기 난사라니. 이곳은 한국인데. 서술자는 체험학습에 가지 않았지만 운 좋게 사건 현장에 있지 않았다.

소설은 K를 주연으로 하는 서사가 끝난 후 존속하는 현실에서 ‘번외’의 삶을 사는 서술자가 사건 1주기에 학교를 조퇴하고 도시를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여준다. 서술자는 산재가 발생해도 대충 덮고 진행되는 공사 현장에서 학교 총기 난사 사건 1주기에는 일을 멈추고 1분 동안 사이렌을 울렸음을 알게 된다. 그게 당연하다는 것. 어디를 가도 그곳에서의 1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아느냐고, 그만큼 죽은 학생들과 그들에 대한 추모는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고귀한 이들이었을 것이라는 찬사들. K에게는 죽은 학생들이 자신의 ‘영화’를 함께 완성한 배우들이었는데도. 즉사하지 않은 희생자를 집도한 의사는 해당 사건의 피해자들을 심혈을 기울여 살리려 했다고 말하고. 이때 서술자는 의사도 환자를 가려서 살리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이는 소설의 도입에서 소리로만 알려지는 공사장 노동자의 죽음과는 달리 취급되는 것이다. 그 노동자 같은 사람은 죽어도 되고, 이 사람은 잘생겼네/그 학교 학생이네, 살려야 해! 서술자가 가는 곳마다 살해당한 아이들의 죽음을 024‘숭고하다’라고 규정하는 발화들 속에서 서술자는 마치 그들이 목적성 을 가지고 죽었다고 여기는 것 같다고, 자신도 죽었어야 했다는 듯 말하는 것 같다고 여긴다. 이런 자기 중심성이라니. 서술자는 K의 총기난사 전에도 비슷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K와 친구가 되지 못했을 테니 이상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K는 서술자에게 큰 사건임은 분명하지만 찐따성을 변화시키고 가는 존재는 아닌 셈이다. 창작물에서 흔히 찐따성을 벗겨내는 역할을 수행하는 위치의 캐릭터가 실패했다. 서사는 멈췄다. 서술자는 계속해서 찐따인 채로 있고 비련의 생존자 속성을 덧입히는 주위의 시선들과 함께 소설은 진행되고 끝난다. 혼자만 살아남은 자신과 그에 복잡한 심정을 가지는 자신을 조롱하고(쿨찐의 방어기제이다) 살아남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조롱하고 겉돌고 미끄러진다.

박지리 장편소설 『번외』(사계절, 2018) 표지.

서술자와 나를 동일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욕망이 있는 건 맞지만 그건, 그건 좀 아니다. 서퀴 같은 장소에 『번외』를 챙겨간 이유를 설명하고 싶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왜 챙긴 것인지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사람의 목숨을 장사에 동원하고 이윤을 위해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나라와 기업들 사이에서 자라온 게 갑자기 부끄러워진 걸까? 쉽게는 K와 서술자의 로맨스 서사 때문에 챙겼다는 025설명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아무튼, 부끄럽다는 말을 계속 써보자. 서퀴의 수많은 부스를 보고 여러 갈래의 투쟁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더 많이 더 다양하게 더 명확하게 활발하게 실천하고 연대하고 투쟁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어떤 현장에 가도 더 많이 연대하지 못해 부끄럽다는 말을 쓰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구태여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이미 활발하게 투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더 실천하고 더 치열하게 공부하고 사고했어야 하는 것을. 이런 흐름이라면 아무래도 서술자와 나를 동일시하고 싶어서 책을 챙겼다는 설명이 명쾌하게 들어맞는 것 같다. 굳이 나열하지는 않겠지만 두루두루 상대적인 안전지대에서 운동이나 인간관계 이곳저곳에 냉소를 가져도 되는 부끄러움과, 이런 부끄러움에 집착하고 있다는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기도 하니 동일시에 연결하면 좋을 것 같다. 사람이 많은 곳에 적응이 조금(정말 조금이다. 기능에 지장을 주는 일이 드문 정도로) 어렵다고 변명하는 꼴이지 않나. 절망적으로 형편없는 변명이다. 이런 특성에 천착하고 있어도 되는 위치라니.

뭔가 잔뜩 말하기는 했는데 뭘 어쩌자는 말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포켓몬과 건담을 말했던 수업의 첫 과제는 자기소개 글 겸 성찰글을 쓰는 것이었다. 거기서도 넓은 의미의 운동activism 참여에 대해서 여러가지의 것들을 모르겠다는 말을 썼다가, ’뭘 모르겠는지‘에 대해서 좀 명확하게 써보라는 평을 우수수 받았다. 그런데 “뭘 모르겠다는 것인지 명료하게 써내라”니 그걸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겠는 걸 어쩌냐는 말이다. 그러면 또 지적 불성실함을 어떻게 해보라는 말을 듣겠지.

앞서 내가 빠른 시일 안에 고립될 것 같다고 썼지만, 아마도 여러 안전지대의 효과로 다소 일반적으로 살아갈 것이다. 중고등학교에서 고립되지 않았던 것처럼. 대화가 어렵다고는 썼지만 형식이 정해져 있는 문답은 그럭저럭 해낼 수 있고 자유로운 대화를 하지 못하는건 두루026두루 많이들 겪는 문제니까. 양해가 구해지는 수준의 문제를 가지고 있으니 그럭저럭 살 수 있겠지. 집회에서 멀뚱거리고 서있는 것도 심각해질 일이 아니다. 두드러지는 현상은 ‘진짜 친구’를 만들지 못하는 것일 텐데, 이놈의 ‘진짜’ 타령은 질리지도 않고 나와 너 사이를 배회하는 유령이니 무시하도록 하자. 정말로, “하나의 유령이 인간관계를 배회하고 있다……. 그 유령은 ‘진짜 뭐시기’라는 유령이다……. 진짜의 환상을 만드는 이들을 막기 위해 찐따의 신성동맹이 만들어졌다…….[3] 그들의 존재는 인간관계에 ‘진짜 뭐시기’ 같은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음을 드러낼 것이다.” 이런 대화를 주고 받으면 되는 것 아니겠냐 이거다. 『물까치』 1호에 “연대를 만드는 조건이 뭘지”라고 내가 써놓기는 했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아직도 전혀 모르겠다. 이제는 저 말이 ‘진짜 연대’를 말만 바꿔서 써놓은 것 같다는 생각도 조금 든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짓고 구분짓게 하는 것은 누구란 말인지. 그래도 계속 생각해 봐야겠지만. 같이 생각할 사람을 먼저 구해야 하므로 절찬 모집 중이다.

『번외』의 서술자도 나처럼 별 문제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것이고 찐따같지만 나름대로 일반적인 삶을 살아갈 것이다. 서퀴에 참여해서 K를 떠올릴 것이고 뙤약볕과 부스 줄 앞에서 힘없이 발길을 돌릴 것이다. 길을 걸을 때 사람들을 보면서 걷지 않으려고 신경 쓸 것이고 얼굴이나 눈과 마주치면 순식간에 고개를 숙이거나 피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거북목이 심해질 텐데 말이다. 이 문장을 쓰고 말려있던 허리를 폈다. 아마도 출소한 K를 다시 만나지는 않겠고 가끔씩 사람과 연결되지 못한다는 기분에 시달리거나 하겠지. 딱 그 정도의 고민들, 그러니까 ‘너 나 우리’가 할 법한 고민들. 그 후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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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나 우리’라는 밈이 언제부터 찐따를 지칭하는 데 쓰이기 시작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알고 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예시는 가스파드의 『선천적 얼간이들』에서 “얼간이가 뭐야?” / “너 나 우리” 하는 장면이다. 확실한 대사는 아닌데 대강 이렇다. 그 이후로든 이전부터 그랬든 찐따들이 서로를 묶어서 부르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잦은 것으로 안다. 재밌는 현상이다. 서로를 혐오하는 찐따들이 자학을 위해서 서로를 묶어 지칭하는 표현을 사용하다니 말이다. ‘찐따’ 자긍심은 생기지 않더라도 ‘너 나 우리’로 포장된 찐따 자긍심은 생길 수 있을 것 같다. 농담처럼 보여서 그런 걸까. 밈적인 사고에 절여진 너 나 우리는 밈을 거치면 자신을 긍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식의 라벨링은 전혀 환영할 수 없지만!

서퀴를 다녀오고 나서 자괴감이 조금 더 심해지긴 했어도 찐따성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게 되었으니 그러려니 해야지 싶다. 어차피 이런 자괴감은 떨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처해 있는 조건에서 가능한 것을 계속 찾아봐야지……. 멀뚱멀뚱 서 있는 집회에 나가고 입 뻥긋하지 못하는 간담회와 공부 모임에 나가서 대화를 듣고 글을 읽어야지. 최근에는 장소와의 어긋남을 변명으로 쓰기 어려워져서 그런지 몸이 두통을 생산해서 활동 참여를 저해하는 중이다. 몽글몽글한 두통과 찌르는 두통. 밥을 먹으면 사라지는 것들. 정말 참여하고 싶은 활동에도 참여하는 것이 어려워지기 전에 미리미리 운동exercise해둬야 한다…….

찐따성이 해소되어 버리는 창작물들에 대한 감정적인 악평을 줄줄이 써두기는 했지만, 재밌게 본 것들이니 넓은 아량으로 받아들여 주시면 좋겠다. 특히나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은 세간의 평가가 갈리는 편이던데 생각할 지점이 많으니 「에반게리온: 서/파/큐」와 함께 한번쯤은 보는 것을 추천한다. 생각할 지점이 많다는 것은 재밌는 지점이 028많다는 것.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찐따에게도 바라건대 공격적으로 읽히지 않았다면 좋겠다.

『번외』를 읽으신 분이 계시다면 『물까치』 독자엽서를 통해 감상을 나눠 주셔도 좋을 것 같다. 비공개 또는 익명화 여부를 선택할 수 있으니 부담 갖지 말고 작성해 주시길. 읽지 않았다면 당연히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책 읽는 우리가 출판업계의 빛과 소금이다. 제지회사의 담합에도[4] 책 가격을 일정 정도 방어해낸 출판사에 약간의 감사를. ◆

× 1 (편집부) 로맨스의 발단 단계에서 통용되는 클리셰의 하나. 주인공 소년이 우연히 어떤 소녀와 만나면서 둘 사이에 호감이 발전한다.
× 2 (편집부) 같은 작가의 『회색인』과 이어지는 장편소설. 손오공의 모험 대신 현대인 남자 주인공의 혼란스러운 정신적 모험이 펼쳐진다.
× 3 (편집부) 『공산당 선언』의 서두 오마주.
× 4 (편집부) 2026년 4월, 공정거래위원회는 6개 제지사가 담합하여 인쇄용지 가격을 인상하고 부당이득을 얻은 행위를 제재하였다. 공정위에 따르면, 담합이 있었다고 인정된 2021년부터 2024년 사이 인쇄용지 판매가격이 평균 71% 올랐다. 한편, 대한출판문화협회 자료에 따르면 2024년 신간도서 평균 정가는 2만 원에 육박하며, 2020년 대비 20% 가까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