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까치』 №03 §029 「체념과 절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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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절박함

최수지

비서공 활동회원

관악중앙몸짓패 골패 패짱

5월 초, 한참 총동아리연합회의 ‘학생회관 게시판 사용 규칙 초안’ 대응을 하느라[1] 정신이 없던 중, 골패의 전 패짱[2]이던 아영을 통해 장문의 문자를 전해 받았다. 홍진훤이라는 작가가 동시대 한국의 집회를 매체적으로 탐구하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현재 ‘몸짓’의 위치를 재확인하기 위해 관심 있게 지켜보던 몸짓패인 골패에 협력을 요청드리고, 한번 만나 뵈면 좋겠다는 문자였다.

얼떨떨했다. 활동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는 말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지금까지 미술관과 동떨어져 있는 삶을 살아온 터라 어떤 방식으로 작품에 협력하게 될지, 심지어 작가라는 사람을 만났을 때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서울대입구역 근처 카페에서 처음으로 작가님의 얼굴을 뵈었다. 작가님은 자신을 ‘집회 오타쿠’라고 소개했다. 그동안 사진으로 기록해 온 여러 집회 현장에 관해 이야기하고, 몸짓패 공연복의 특징부터 ‘선언’[3]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노동조합 몸짓패의 계보까지 설명했다. 030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최근의 집회 문화로 옮겨갔다. 작가님은 집회가 점점 하나의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다는 문제 의식을 꺼내셨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지난 겨울의 집회들을 떠올렸다. 집회에 나온 시민들은 위플래쉬의 반복적인 비트에 맞춰 “퇴진 퇴진 윤석열 퇴진”을 외쳤다. ‘선결제’ 문화가 생겼고, 평소 먼지 알레르기가 있다며 함께 집회에 가자는 나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던 친구도 먼저 집회에 오겠다는 말을 꺼낼 정도였다. 윤석열 퇴진과 사회대개혁을 향한 시민들의 열망이 분출되고 있었음은 틀림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대형 집회에 가지 않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몇 시간이고 반복되는 단조로운 비트가 귀를 괴롭게 했다. 세종호텔 고공농성장을 거치는 어느 밤의 행진에서는 “장애인 혐오 박살내자”, “성소수자 혐오 박살내자”를 외칠 때 주변의 목소리가 급격히 작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몇몇 구호는 오히려 더 크게, 목이 갈라질 정도로 외쳤다. 그러고는 행진이 끝나기도 전에 급하게 빠져나왔다.

그렇게 작가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집회와 몸짓에 대해 생각했던 바를 이것저것 이야기했고, 얼마 뒤 작품에 들어갈 퍼포먼스와 인터뷰에 참여하기로 했다.

◇

퍼포먼스 일정이 5월 15일로 확정되었다. 마침 그날이 스승의 날이어서, 퍼포먼스를 하러 가기 전 서울대 내에서 서울시교육청의 8대 요구안 이행 촉구 기자회견과 지혜복 교사 간담회를 공동주최하는 일정이 있었다. 밤을 샜음에도 기자회견에서 골패 이름으로 하는 발언을 제대로 준비해 가지 못했다. 그렇게 간담회 시간에 꾸벅꾸벅 졸다가 질문 하나도 하지 못한 채 버스를 타러 먼저 떠났다. 지혜복 선생님께 죄송스러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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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은 나에게 영상에 삽입될 독무 퍼포먼스를 제안하셨다. 무대 위에서 미리 준비해 둔 곡 목록에 맞춰 쉬지 않고 1시간 동안 몸짓을 하되, 헤드폰과 마이크를 착용해야 했다. 내가 듣는 민중가요는 마이크에 녹음되지 않고, 몸짓을 하며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발소리만 녹음된다. 내가 경험해 온 집회 현장의 무대와 완전히 반대되는 조건이었다. 바닥에 앉아 발언을 듣다가 순서가 되면 앞에 나와 짧은 연대 발언을 하고, 앰프에서 크게 트는 민중가요에 맞춰 다른 동아리원들과 함께 몸짓을 하는 것은 익숙해졌지만, 관객이 없는 극장 무대 위에서 홀로 카메라를 보고 춤을 춰 본 적은 없었다.

체력이 좋지 않은 편이라 1시간 몸짓을 요청받았을 때부터 걱정이 앞섰다. 춤추다가 죽는 거 아닐까? 아니, 애초에 내가 지금까지 익힌 몸짓 레퍼토리가 1시간을 채울 정도가 될까? 몸짓할 수 있는 곡들을 하나씩 세 보았다. 〈바위처럼〉, 〈불나비〉, 〈내일이 당당해질 때까지〉, 〈강〉, 〈파도 앞에서〉, 〈소나기〉……. 〈오리 날다〉처럼 민중가요로 보기 애매한 곡들은 목록에서 빼니 총 20분가량의 길이가 나왔다. 그동안 열심히 배워 왔다고 생각했는데, 따져 보니 여섯 곡이라니. 여섯 곡짜리 플레이리스트를 두 번 돌려 40분의 몸짓을 하게 되었다.

촬영 준비가 끝난 뒤 어색한 자세로 무대에 올라가 헤드폰을 꼈다. 부담스러울 만큼 많은 카메라가 나를 향해 있었다. 조명도 예상했던 것보다 밝았다. 경직된 몸을 풀고 몇몇 동작을 연습했다.

춤추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나의 우려는 어느 정도 적중했다. 촬영을 시작한 뒤 10분쯤 지나자 헉헉대느라 제대로 춤을 출 수 없었다. 땀이 계속 눈으로 들어가 제대로 눈을 뜰 수도 없었다. 너무 힘들면 중간에 잠시 쉬어도 된다고 하셨지만, 시작한 지 10분밖에 지나지 않아 쉬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눈을 감고 틈틈이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 가며 어떻게든 몸짓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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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곡에 맞춰 몸짓을 할 때는 의식적으로 힘을 내서 추려고 했다. 최근에 가장 많이 해서 몸에 익은 〈파도 앞에서〉를 출 때에는 기합을 넣었다. 연대공연을 갈 때 제일 많이 추는 곡이자 호응이 좋은 〈불나비〉의 “친구야 가자 가자”에서는 공연에서 하는 것처럼 ‘가자’를 따라 외쳤다. 중반부터는 어떻게 계속 출 수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작가님의 말에 의하면 그때부터 춤을 추면서 노래를 따라 불렀다고 한다.

그렇게 40분가량 몸짓을 끝내고 무대 뒤편으로 돌아왔다. 과장없이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미리 준비해 주신 생수를 마셨다. 살면서 생수 세 병을 그렇게 빠르게 들이켜 본 적이 없었다. 러너스 하이[4]와 비슷한 상태에 도달한 것만 같았다. 정기공연을 동아리원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촬영 스태프님들이 장비를 정리하시던 중 작가님이 이런 말을 던지셨다.

“이 무대가 마지막 몸짓 무대일 것 같아요.”

상황이 어렵긴 하지만 이러저러한 것들을 구상은 해 보고 있는데요, 열심히 홍보해서 신입 부원이 충분히 많이 들어오거나 다른 대학 몸짓패들과 함께 공연한다면――까지 생각하다가 이내 수긍했다. 단과대 새내기배움터나 축제 공연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 저 말을 쉽게 부정할 수 없었다.

5월 15일 촬영을 끝내고 올려다본 어둑한 무대. (촬영: 최수지)

퍼포먼스 촬영 약 한 달 뒤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혹시나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질문이 있을까 싶어 예상 질문지를 받았다. 무난한 질문으로 시작하다가 어느새 읽는 것만으로 숨이 턱 막혀 오는 질문으로 033이어졌다. 일단 입을 열면 어떤 말이든 나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준비를 미루다 보니 약속 당일이 되었다. 결국 횡설수설하면서 인터뷰를 끝냈다. 자세히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몇몇 기억에 남는 질문들을 인용 허락을 받아 지면에 옮겨 본다.

Q. 구체적으로 몸짓을 연습하거나 공연하실 때 신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특히 유념하는 부분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 칼각? 표정? 적개심? 등등.
Q. 몸짓의 시작은 혁명과 투쟁을 위해 이데올로기의 성취를 표상하거나 노동자계급의 투쟁심을 고취시키거나 하는 방향이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냉전 이후 이념 기반의 세계가 붕괴하고 혁명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 버린 세계에서 몸짓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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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중 ‘적개심’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지금까지 익혔던 곡들에서 내가 느끼고 표현하려 했던 정서는 적개심보다는 연대와 희망, 그리고 버티고 나아가려는 결의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이념을 몸으로 표현하는 몸짓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딱 잘라 말하기도 어렵다. 몸짓을 연습하면서 “이 곡이 전달하려는 정치적 지향을 내 몸이 제대로 표현하고 있을까”를 고민하곤 한다.

때로는 지금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혁명’과 ‘투쟁’을 말하는 과거의 곡을 배우고 싶어진다. 지금은 전수받을 수 없는 몸짓을 찾아 과거 골패의 공연 영상을 돌려보기도 한다. 그 시절의 선배들을 만나 본 적조차 없어 영상 속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 곡을 골랐고 무엇에 합의한 채 함께 춤췄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도 그들이 남긴 동작을 따라 하고, 때로는 내가 경험하지도 못한 과거의 움직임을 더 배우고 싶어진다.

그러나 때로는 지금 공연하는 곡들, 그리고 언젠가는 공연하고 싶은 곡들의 가사가 두렵게 느껴진다. ‘민중’과 ‘동지’, ‘혁명’, ‘투쟁’, 그리고 ‘아침’처럼 해방을 은유하는 표현들이. 종종 연대공연을 나갈 때 발언문을 쓰면서 그날 공연할 곡의 가사와 맥락을 가져오곤 한다. 그러나 그 가사가 약속하는 미래를 내가 얼마나 확신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그 작은 희망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

8월, 혼자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6〉 전시에 갔다. 전시장에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촬영 전 작가님이 했던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우울한 작품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네 명의 작가가 참여한 전시였지만 다른 작가들의 작품은 다음을 기약하고, 커튼이 쳐진 마지막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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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작가상 2026 홍진훤 전시. (촬영: 홍철기, 국현미 웹사이트)
〈이미지의 최고 형태는 무장투쟁이다〉 중 한 장면. (촬영: 최수지)

전시장 중앙의 커다란 스크린에서는 〈이미지는 최고 형태의 무장투쟁이다〉가 상영되고 있었다. 그 반대편에는 〈암순응〉과 〈명순응〉이, 양쪽 벽면에는 사진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작품을 제대로 둘러보기도 전에 스피커에서 “노래패가 다 망했잖아요”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전시장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이미 체감하고 있던 현실을 작품을 통해 다시 확인 사살당하는 기분이었다.

스크린에서는 땀에 흠뻑 젖은 채 몸짓을 하는 사람을 찍은 장면과 화염병을 들고 가두시위를 하는 사람들, 혁명 발레[5]의 장면이 교차했다. 내가 경험한 적 없는 과거의 몸들이었다. 가두시위와 혁명 발레 속의 036몸은 내가 경험해 온 몸보다 훨씬 거대하고 단단한 무언가의 일부처럼 보였다. 그 장면들 사이에서 혼자 몸짓하는 내 몸은 이상할 만큼 작고 따로 떨어져 보이기도 했다.

인터뷰할 당시만 해도 현재 내 생활과 동아리의 상황을 어느 정도 자조적으로 이야기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품 안에서 다른 이미지와 목소리 사이에 놓인 내 말을 다시 듣는 일은 생각보다 견디기 어려웠다. 경쟁적인 질서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다고 말했던 내 모습이, 어느 순간에는 그 질서를 거부한 사람이라기보다 그곳에서 도피한 사람처럼 보였다. 몸짓과 운동의 미래에 관해서도 나는 너무 쉽게 쇠퇴와 실패를 예상하는 것만 같았다. 직접 말할 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패배의식이 작품의 일부가 되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자 훨씬 선명하게 들렸다.

몸짓패 활동을 하다 보면 때때로 미묘한 관성을 느낄 때가 있다. 몇 개의 발언 뒤에 공연이 이어지고, 다시 발언이 이어지는 익숙한 형식이 반복된다. 골패의 활동에서도 비슷한 순간을 느낀다. 연대공연 요청을 받으면 사람을 모으고, 얼마 되지 않는 레퍼토리 가운데 두어 곡을 고른 다음, 공연할 곡의 가사를 가져와 발언문을 쓴다. 매번 현장과 곡이 만나는 의미를 충분히 고민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익숙한 노래와 몸짓이 필요한 현장이 있고, 반복되는 형식 속에서도 처음 만나는 사람과 투쟁이 있다. 나 역시 그런 자리에서 힘을 얻은 적이 있다. 그럼에도 이미 알고 있는 노래와 동작, 익숙한 발언의 형식 안에 머무르는 편안함을 관성이라고 의심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무엇을 새로 시도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지금 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만으로 충분한지 자신할 수 없었다.

요즘의 골패를 생각하면 자꾸 마음이 무거워진다. 나부터 무기력에 빠져 있을 때가 많다. 새로운 곡을 만들고, 새로운 활동을 제안하고, 037지금 우리가 하는 몸짓이 현장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좀처럼 그러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골패가 끝나는 장면을 너무 쉽게 상상해 왔다.

그런데 스크린에 비친 사람은 땀에 흠뻑 젖은 채 계속 춤을 추고 있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절박하게 춤을 추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말하고 있는 걸까.

인터뷰에서 혁명에 대한 믿음을 묻는 질문 앞에서는 한없이 머뭇거렸다. 노래가 약속하는 미래를 얼마나 믿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과 얼마 전의 나는 그 노래를 헤드폰으로 들으며 숨이 넘어갈 때까지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좋아하는 곡이 나오면 일부러 더 힘을 냈고, 소리를 질렀고, 나도 모르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반드시 혁명을 믿어야만 춤을 출 수 있는 것일까. 돌이켜 보면 나는 언제나 확신을 먼저 얻은 뒤 몸짓을 해 온 것은 아니었다. 믿기 때문에 몸짓을 하는 것인지, 몸짓을 하면서 잠시 믿고 싶어지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화면 속에서 절박하게 움직이는 몸이 인터뷰 속의 체념을 거짓말로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반대로 패배를 말하는 목소리가 화면 속의 몸을 공허한 몸짓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둘 다 내가 한 말이고, 내가 움직인 몸이었다.

전시장을 나오자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인터뷰 영상이 TV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작가님은 “어떻게 계급 운동의 마지막 풍경을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이번 전시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이것이 마지막 풍경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지금 몸짓패 패짱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것이 마지막 풍경이 아니게 038되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 골패가 어떻게 될지, 몸짓이 어떻게 남을지, 내가 언제까지 이 활동을 계속할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나에게 체념과 절박함은 여전히 함께 남아 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없다. 체념이 절박함을 집어삼키지도, 절박함이 체념을 극복하지도 못한 채. ◆

× 1 (편집부) 2026년 5월 17일 『대학신문』 기사 참조. https://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5191
× 2 (편집부) 몸짓패, 노래패 등 ‘패’의 대표.
× 3 (편집부) 90년대 초 결성된 노동자 노래패. 현재는 노래패와 몸짓패로 구성된 ‘노동예술단 선언’으로 활동하고 있다.
× 4 (편집부) runner’s high. 강도 높은 운동을 하고 엔도르핀이 분비되면서 느껴 지는 상쾌한 기분을 가리킨다.
× 5 (편집부) 20세기 초중반 소련과 중국에서 발전한 장르. 사회주의 혁명적 서사를 표현하기 위하여 독무보다는 군무, 역동적 움직임이 두드러진다.